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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9.09.28

1차 - 1974년,로잔언약

원문 - http://www.lausanne.org/en/documents/lausanne-covenant.html (PDF로 보기)

한글 - http://www.lausanne.org/ko/korean/1872-lausanne-covenant.html (PDF로 보기)


2차 - 1989년,마닐라선언문

원문 - http://www.lausanne.org/en/documents/manila-manifesto.html (PDF로 보기)

한글 - http://www.lausanne.org/ko/korean/1871-manila-manifesto.html (PDF로 보기)


3차 - 2010년,케이프타운서약문

원문 - http://www.lausanne.org/en/documents/ctcommitment.html (PDF로 보기)

한글 - http://www.lausanne.org/ko/korean/1873-ctcommitment.html (PDF로 보기)


* 참고 블로그(티스토리) - http://wcnlink.tistory.com/2510967  (제3차 로잔대회 '케이프타운 선언문(2010)에 대한 때 늦은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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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플로리다주 김종필목사님의 제3차 로잔대회 참가기를 정리하여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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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시아 선교지도자들은 제 7회 아시아선교협의회 대회와 더불어 AMA 설립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다시 한번 오대양 육대주의 동서와 남북이 교차하는 곳에 위치한 남태평양의 관문(關門)국가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 모였다. 아시아의 20개 국가로부터 공식대표들이 참석하고 또한 세계의 여러 다른 나라들로부터 형제 선교 동역자들도 참석하였다. AD2000년 10월 23일부터 27일까지 열린 이 대회에서 우리는 매일 아침 성경 강론을 통하여 제삼의 천년에 대한 우리의 비전을 함께 나누었다. 그리고 참가자 전원 참석회의에서 선교에 관한 예언적 음성을 들었다. 또한 국가별 보고를 통하여 아시아의 모든 회원 국가들의 선교운동의 현황을 배울 수 있었다. 매일 저녁에는 선교 부흥집회를 통하여 인도네시아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선교 도전을 하였다. 대회 마지막에 우리는 새로운 천년에 있어서의 기독교 세계선교를 위한 새로운 길을 닦기 위한 다음과 같은 우리의 발견과 헌신을 선포하기로 합의하였다.
1. 서구 세계의 정복적 종교로서의 기독교 선교시대였던 천년시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지난 반세기 동안에 탈식민지 국가들은 식민지 교회로부터 자기 민족의 자생적 교회로 발전하였다. 이 교회들은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크게 번성하였다. 기독교는 더 이상 서구 종교가 아니라 세계 종교이다. 탈식민지 국가들은 미래의 세계 종교인 기독교의 새세력이 되었다. 우리아시아선교협의회는 많은 거침돌들을 제거하고 새로운 기독교 세계선교의 발전을 위한 길을 닦아놓았다. 우리는 이제 기독교는 더 이상 서구 종교가 아니라 모든 세계 민족들을 위해 준비된 세계 종교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우리이 선교가 세계의 힘없고 위험에 빠진 민중을 위한 소망과 평화와 사랑과 화해를 가져오는 선교가 되기를 소원한다.
2. 우리는 전통적 서구 선교사들보다 비서구 국가들의 선교사들의 수가 더 많은 것을 발견하였다:오늘의 세계에서의 선교 세력은 말 그대로 모든 나라들로부터 보내지고 있다.
비서구 국가들의 선교사의 수가 서구 선교 세력의 거의 두 배의 크기에 달하는 16만 명을 넘고있다. 아시아 선교사들은 그 중심 세력이며 그 숫자가 많고 세계의 모든 지역에 흩어져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의 세계선교 사역을 강화하기 위하여 선교사의 훈련과 지원
과 양성과 선교사를 파송하고 그들을 돌보는 일을 계속할 것을 약속한다.
3. 우리는 다음과 같은 우리 비서구 선교단체들의 허약함을 발견하였다:
(가) 출판과 정확한 데이터와  선교현황에 대한 연구와 같은 우리에게 필요한 정보에
접속하는 일에 대한 결핍,
(나) 선교단체의 운영의 왜소함과 선교사에 대한 인식의 부족과 재정적 지원의 제한.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AMA의 국가별 회원 선교협의회들이 아시아의 세계 선교운동의전진을 위하여 우리의 이러한 허약한 부분을 강화하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서로가 협력하 여 주기를 강력히 권고한다.
4. 우리는 선교현장에서의 우리의 비조직적 흐트러진 노력들과 그 사역에 동참하고 있는 우리 선교사들 간의 조화를 재 활성화 시켜야 하는 우리의 책임을 확인하였다. 선교지 사업들의 중복과 경쟁을 피하기 위하여 모든 나라들의 선교 구조의 쇄신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의 자원의 누수(漏水)를 방지하고 우리의 노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하여 협력하여야만 한다. 우리는 여기에 세계 사역들의 구조들의 협력을 위한 범아시아포럼을 만들 것과 아시아 선교사들의 협의회 조직을 재 강화할 것을 널리 알린다. 우리는 모든 회원 국가들에게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동역자들로서 이 포럼과 선교사들의 협의회에 동참할 것을 강력히 권고한다.
5. 우리는 전도에 대한 성경의 명령을 재확인한다. 그러나 우리는 선교의 역사 속에서 때로는 그것을 잘못 실천하여 왔다. 우리는 단순히 기독교 선교의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여서는 안 되며 우리를 신약 성경적 전도의 질서의 계승자로 활동해야만 한다. 우리는 서구식민정권 아래 억압 받는 민족들이었으며 힘없는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들이그 시대에 권세 잡은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처럼 세상 권력들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다. 우리가 사도 바울의 선교의 모형을 따르고 그것을 계승하려면 선교의 지난날의 잘못된 모형을 탈피하는 일이 가장 긴요한 요건이다.
6. 우리는 선교의 미래가 개발 지향에 초점을 두어서는 안 되며,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대망하는 것이라야 한다고 선언한다. 우리의 선교는 세속적 개발로부터 분리되어야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땅 위에 다시 오실 그의 영광스러운 재림의 날에 모든민족들을 그의 보좌 앞에 부르시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에 미래의 기독교 선교는 모든 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확언한다.우리 아시아선교협의회는 민족의 신앙공동체로서의 교회로 새로워지도록 노력할 것이다. 교회는 아시아에서 때때로 있었던 잘못된 역사를 극복하고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교회가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늘로 승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그 과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이 새로운 천년의 선교의 환상을 새롭게 하여야 할 책임을 위하여 아시아인의기독교 선교의 모든 지도력을 바쳐서 헌신할 것이다.우리는 모든 민족의 구주이신 우리 주님을 위하여 우리가 쓰임을 받을 만큼 유용(有用)하고충성된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아멘.

출처 : http://www.davidcho.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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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前文)
우리, 아시아선교협의회는 일본 고베(神戶)에서 1997년 4월 8일부터 11일까지 제 6회 삼년차 대회로 모였다. 참가자들은 일본, 브라질, 캄보디아, 이집트, 가나, 홍콩, 인도 인도네시아,케냐, 한국, 뉴질랜드, 나이제리아, 필리핀, 루마니아, 러시아, 남아프리카, 대만, 타일랜드, 미국, 그리고 잠비아 등 20개국으로부터 왔다.
대회의 주제는 “하나님의 영광과 땅 위의 평화를 위한 모든 세계를 향한 선교”였다.
‘모든 세계를 위한 선교’를 위한 성경 강해가 날마다의 전체회의와 웍샾에 앞서 주어졌다. 성경강해에 이어 계속된 전체회의에서는 ‘예언의 소리’, ‘아시아인의 소리’, 그리고 ‘아시아인의 과업’이 선포되었다. 저녁 선교대회는 그리스도의 지상명령과 교회성장, 그리고 부흥을 위한 성령의 권능이 강조되었다.

우리의 확약(確約)
우리는 선교의 성서적 원리의 계승을 선언한 1975년의 ‘기독교 선교에 관한 서울선언’과 휫튼선언와 베를린선언, 프랑크푸르트선언을 계승할 것과 그리고 선교의 역사적 실패와 오류들로부터 단절할 것을 선언한 것을 재확인한다.
우리는 1982년의 ‘기독교 선교에 관한 아시아인의 서약’을 재확인한다. 우리의 서약은 하나님에 대한 책임; 인간에 대한 책임; 교회에 대한 책임; 사회에 대한 책임; 그리고 세계에 대한 책임이었다.
우리는 1986년의 ‘세계선교와 세계평화를 위한 제삼세계선언’을 재확인한다.
우리는 제삼세계선교협의회와 세계평화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선언하였었다.
우리는 1991년의 ‘우쯔노미야 결의’를 재확인한다. 우리는 선교단체와 개교회들 간의 협력; 적대하는 세계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사신들로서의 경의로운 책임을 지휘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우리의 복종과; 저들이 통과하는좋은 환경에서나 나쁜 환경에서나 우리 동료 사역자들의 사업들과 목표들에동참하기 위한 전략과; 범국가적 선교를 위한 컨설테이션을 촉진시키고, 선교사들의 협의회를 구성하도록 격려하고 또한 선교사의 훈련과 연구, 그리고 상호기금의 조성에 동참하도록 하기 위한 우리의 목표들과; 세계그리스도인들과 선교지도자들과 선교지의 선교사들과 선교의 짐을 함께 나눌 젊은 세대들에게 호소하기로 한 우리의 합의를 결의하였다. AD 2000년으로부터 시작되는 제3의 천년 시대의 새로운 세계질서는 아시아의 교회가 다가오는 그의 나라를 향한 길을 예비하는 기독교 선교의 기수가 되도록 도전하고 있다.
우리의 기독교 선교의 과업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과의 평화와 사람과의 평화와 또한 모든 민족들 사이의 평화를 통한 땅 위의 평화를 위한 선교이다.
다가오는 격동하는 세계에서,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케 하시는 권능을 통하여 모든 세계가 치료함을 받도록 평화의 왕의 이름으로 통하여 화평케하시는 권능을 통하여 화평케 하는 자, 화목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기독교 선교의 메시지는 종말론적이어야 하며, 하늘로부터 땅에 임하실 그의다시 오심에 대한 것이라야 한다.
로잔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구원과 심판의 완성으로 결론지었다. 교회의 선교는 왕 중의 왕이 이 땅에 다시 오실 그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다. 현대 선교학의 문제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선포하는 데 실패한 데 있다. 재림의 메시지는 절망에 처한 민중과 소망을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최고의 메시지이다. 이 메시지는 이 세계에 대한 비할 데 없는 기쁜 소식이며, 새로운 세계와 새 날을 기다리는 민중들에게 변개(變改)할 수 없는 약속이다.
다가오는 세계는 난폭한 세계이며, 세계 역사의 끝을 향하여 접근하고 있는 불치의 세계이다. 그러한 증상들은 이미 지금 이 세상에 있다. 인류의 운명과 기독교 선교는 종말론적인 세계관과 상호 연관되어 있다.
사도 바울이 선포한 ‘새 하늘 새 땅’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는 종말론적인 것이었다.

출처 : http://www.davidcho.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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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974년 7월, 스위스 로잔에서는 세계복음화국제회의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이 대회는 로잔언약(the Lausanne Covenant)을 발표했다. 1989년 7월에는 약 170여 개국에서 3,000여명이 같은 목적으로 마닐라에 모여 마닐라선언문을 발표하게 되었다. 우리는 필리핀 형제자매들로부터 받은 환영에 대하여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 두 회의 사이의 15년 동안, 복음과 문화,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 검소한 생활양식, 성령, 중생과 같은 주제로 소규모의 신학협의회들이 모였다. 이런 회의와 그 보고서들은 로잔운동에 관한 생각을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선언’이란 신념과 의도와 동기를 선포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닐라선언문은 이번 대회의 두개의 주제인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그를 선포하라”와 “온 교회가 온 세상에 온전한 복음을 전하라는 부름”에 기초하여 작성되었다. 제 1부는 21개 항목의 신앙적 고백(affirmations)으로 구성되었으며, 제 2부는 12항목으로 주제를 설명하였다. 교회들은 이 선언문을 <로잔언약>과 함께 연구하며 실천에 옮기기를 바란다.

21개의 항의 고백
1. 우리는, <로잔언약>을 계속 로잔운동을 위한 협력의 기초로 삼고 일해 갈 것을 확인한다.
2. 우리는, 하나님께서 신약 성서와 구약성서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품과 뜻,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적 역사(役事)와 그 의미를 권위 있게 드러내실 뿐 아니라 선교를 명하고 계신 것을 확실히 믿는다.
3. 우리는 성서의 복음이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임을 확인하며, 이복음을 변호하고 선포하며 이를 구체적으로 표현할 것을 다짐한다.
4.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나, 죄인으로서 죄책이 있으며, 그리스도없이는 멸망의 존재임을 믿으며,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우선적으로 알아야할 필수적 진리인 것을 믿는다.
5. 우리는, 역사적인 예수와 영광의 그리스도가 동일한 분이시며, 이 예수 그리스도만이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시요,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음을 이기신 분이요, 재림하실 심판자이므로, 절대 유일한 분인 것을 믿는다.
6.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죄를 지시고 죽으셨기때문에 이에 근거해서만 하나님께서는 회개와 믿음으로 나오는 사람들을 값없이 용서하신다는 것을 믿는다.
7. 우리는, 다른 종교나 이데올로기가 하나님께서 나아가는 또 다른 길이라고 볼 수 없으며,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되지 않는다면 인간의 영성은 하나님께 이르는 것이 아니라 심판에 이른다는 것을 믿는다.
8.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되, 정의와 인간의 존엄성, 그리고 의식주의문제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돌아봄으로써 그 사랑을 실천적으로 입증해야 한다는 것을 믿는다.
9. 우리는,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므로, 개인적인 것이든 구조적인 것이든 모든 불의와 억압을 고발하면서 이 예언자적 증거에서 물러서지 않을 것을 고백한다.
10. 우리는, 전도에 있어서 그리스도에 대한 성령의 증거가 절대 필요하며, 따라서 성령의초자연적인 역사가 없이는 중생이나, 새로운 삶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믿는다.
11. 우리는 영적인 싸움을 위해서는 영적 무기가 필요하므로,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을 선포하며 정사(政事)와 악의 권세를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항상 기도하여야 한다는 것을 믿는다.
12.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교회와 모든 성도들에게 그리스도를 온 세상에 알리는 과제를 부여하셨음을 믿기 때문에 평신도나 성직자나 모두가 다 이일을 위하여 동원되고 훈련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13. 몸된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믿고 행하는 우리는 인종과 성(性)과 계층을 초월하여 성도의 교제를 나눠야 한다는 것을 믿는다.
14. 성령의 은사는 남자든 여자든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주어져 있으므로, 우리는 복음전도에 있어 함께 동역하여 선(善)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믿는다.
15.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은 성결과 사랑을 생활 속에서 드러내야 한다는 것을 믿는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증거는 그 신빙성을 잃게 될 것이다.
16. 우리는, 모든 교회의 성도들이 속한 지역 사회에서 복음증거와 사랑의 봉사에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을 믿는다.
17. 우리는, 교회와 선교단체, 그리고 그 외 여러 기독교 기관들이 전도와 사회참여에 있어 경쟁과 중복을 피하면서 상호 협력이 절실히 필요한 것을 믿는다.
18. 우리가 사는 사회의 구조, 가치관과 필요 등을 이해하기 위하여, 이 사회를 연구하여, 적절한 선교전략을 개발하여 나가는 것이 우리의 책임인 것을 믿는다.
19. 우리는, 세계 복음화의 긴급성과 아울러 미복음화 지역에 사는 사람들(unreached people)에게도 전도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20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에 세계 복음화라는 과업을 위하여 새로운 결단으로 헌신할 것을 결의한다.
20. 우리는, 복음으로 인하여 고난 받는 사람들과의 연대 의식을 확인하며, 우리 역시 그와같이 고난 받을 가능성에 대비하여 우리 자신을 준비시키는 일에 힘쓴다. 아울러 모든곳에서의 종교적, 정치적 자유를 위하여 일할 것이다.
21. 우리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 온전한 복음을 전하라고 온 교회를 부르고 계신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신실하고 긴급하게 그리고 희생적으로 복음을 선포할 것을 결의한다.


I. 온전한 복음
복음은 악의 권세로부터의 하나님의 구원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건설,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에 도전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승리에 관한 기쁜 소식이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창세 전에 그렇게 하시려고 목적하였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죄와 사망과 심판에서 해방시키는 계획을 성취하셨다. 진실로 우리를 자유케 하고 구속된 자들의 사귐 속에서 우리를 연합시키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1. 인간의 곤경
우리는 온전한 복음, 즉 성서적 복음의 그 충만함을 전파하는 일에 헌신한 자들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왜 복음이 필요한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인간은 남자나 여자 모두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도록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모든 고유한 존엄성과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그들의 인간성은 구석구석이 다 왜곡되었다. 인간은 자기중심적이며 자기를 섬기는 반역자가 되어 마땅히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 결과, 인간은 창조주와 또 다른 피조물들로부터 소외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 방황,고독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죄는 또한 반사회적 행동, 다른 사람들을 격렬히 착취하는 일,그리고 하나님께서 인간들로 하여금 청지기로 지키라고 주신 자원들을 고갈시키는 일을 감행한다. 따라서 인간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죄인이며 멸망으로 이끄는 넓은 길을 걷고 있다.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부패되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인간에게는 이웃을 사랑하고품위 있는 행동을 하며 아름다운 예술을 창조할 만한 능력이 있다. 그러나 인간이 성취한것은 제아무리 훌륭한 것이라 해도 숙명적으로 부족할 수밖에 없어 결국은 하나님의 면전에 들어가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남녀 구분 없이 모든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종교적 행동이나 자기 향상을 위한 기교가 인간의 필요를 다소 경감시킬 수 있을지라도 그것이 죄와 죄책과 심판의 준엄한 실재를 근본적으로 피하게 할 수는 없다. 인간의 종교나 인간의 의(義)나 사회, 정치적 제도도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다. 어떤 종류의 자력구원도 불가능하다. 인간은 자기 혼자로서는 영원히 잃어버린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죄, 하나님의 심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육신,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거짓된 복음들을 우리는 거부한다. 우리는 또한 죄를 극소화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의 자기 노력과 혼동시키는 사이비 복음들도 배척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때로는 복음을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전도에 있어서 하나님의 철저한 진단과 아울러 하나님의 철저한 치유를 기억할 것을 결의한다.

2. 오늘을 위한 기쁜 소식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우리를 멸망과 절망의 자리에 내버려두지 아니하심을 인하여 기뻐한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재창조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찾아오셨다. 그러므로 기쁜 소식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겸손한 섬김의 삶을 사시고,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죄와 저주를 담당하신 예수라는 역사적 인격에 그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그 예수는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일으키사 하나님의 아들로 입증하신 분이시다.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새 창조에 참여케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사, 우리를 죄에서 용서하시며 또한 성령의 내주하시고 변혁시키는 능력을 주신다. 하나님은 모든 인종과 민족과 문화에 속한 각기 다른 사람들로 구성된 하나님의 새로운 공동체 안으로 우리를 받아 주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어느 날 우리가 하나님의 새 나라에 들어갈 것을 약속하신다. 그때에 악은 모두 제거되고 자연 세계가 구속되며, 하나님께서 영원히 통치하실 것이다.
이 복된 소식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며 이 복음을 알려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 혹은 공공장소에서, 라디오와 텔레비전으로, 혹은 옥외에서도, 가능한 곳이며 어디서나 담대하게 선포되어야 한다. 우리는 말씀 전파로써 하나님께서 성서에 계시하신 진리를 신실하게 선포하며, 또한 이 복음을 우리의 상황에 적용시키기 위하여 애써야 한다.
우리는 또한 변증론, 즉 복음을 변명하며 확정하는 일(빌 1:7)이 선교를 성서적으로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며, 또한 현대 세계에서 효과적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본질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설득’시키려고 그들과 성서의 말씀을 가지고 ‘변론’했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자신들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고 있어야 한다(벧전 3:15).
우리는 다시 한 번 누가가 강조한 바 복음이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된 소식이라는 사실에 직면하면서(눅 4:18; 6:20; 7:22) 이것이 세계 각 곳에서 착취당하며, 고통을 당하거나 억압받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스스로 반문해 왔다. 우리는 율법, 선지자, 지혜서,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 이 모두가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따라서 우리에게도 그들을 변호하고 돌보아야 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음을 기억한다. 성서는 또한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만을 바라고 있는 영적으로 가난한자도 이에 포함시키고 있다. 복음은 영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 모두에게 복된소식이 된다. 경제적 상황이야 어떻든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오면, 믿음을 통해 값없이 주시는 구원을 선물로 받는다.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이밖에 다른 길은 없다.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무력한 사람들은 이와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새로운 존엄성과 또한 그들을 억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저들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함께 노력하는 형제자매들의 사랑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성서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진리를 조금이라도 소홀히 한 것을 회개하며 그 진리를 변호하며 선포하기로 결의한다. 우리는 또한 가난한 사람들의 곤경에 대하여는 무관심하고 부유한 사람들을 선호해 왔던 것에 대하여 회개하고, 또한 말과 행동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복된 소식을 선포하며 예수를 따를 것을 다짐한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우리는 점차 다원화되어 가는 세상에 그리스도를 선포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세상에는 옛종교의 재흥도 있고 새로운 종교가 발생하기도 한다. 기원후 1세기에도 ‘많은 신과 많은 주’(고전 8:5)가 있었다. 그러나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필수성 및 중심성을 담대히 주장했으며 우리도 그와 같이 행하여야 한다.
남자나 여자나 사람은 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피조물 속에서 창조주의 흔적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기존의 종교 속에 때때로 진리와 미(美)의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기도하다. 그렇다고 이런 것들이 또 다른 복음일 수는 없다. 인간은 죄 있는 존재이며 “온 세상은 악한 자의 지배 아래 있기”(요일 5:19)때문에, 종교적인 사람일지라도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서, 즉 그리스도의 사역을 믿음으로 분명히 받아들이지 않고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종종,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었기 때문에, 예수를 그들의 메시아라고 인정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유대인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예수가 필요하다는 것을 확신한다. 복음을 “먼저 유대인에게” 전하라는 신약 성서의 모형(pattern)을 저버리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불순종일 뿐 아니라, 반유대주의(anti-Semitism)의 한 형태일 수도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대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이 있음으로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다고 하는 주장을 배격한다.
우리를 연합시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공통된 믿음이다. 우리는 그분이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한다. 그는 온전한 신성을 소유하시면서도 온전한 인간으로 오셨으며,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죄를 지고 우리의 죽음을 대신하셨고, 자신의 의를 우리의 불의와 바꾸고, 변화된 몸으로 승리롭게 부활하셨으며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이다 예수만이 성육신하신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 주님이시며 심판자이시다. 그러므로 그 분은 성부와 성령과 함께 모든 사람들의 예배와 신앙과 순종의 대상이 되기에 합당한 분이시다.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구원의 유일한 길이 되신 분은 오직 한 분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하나의 복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종교와 영성(靈性)이 다같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효한 접근 방법으로 간주하는 상대주의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다른 신앙들을 혼합하려는 혼합주의를 모두 배격한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모든 사람이 인정하도록 지극히 높이셨으며 우리도 그렇게 하기를 열망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므로, 우리도 그리스도의 자상 명령에 순종하고 그의 잃어버린 양들을 사랑해야 한다. 특별히 우리는 그의 거룩한 이름에 대한 “질투”로 인해서도,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합당한 영예와 영광을 받게 되기를 갈망한다.
과거 우리는 다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무지, 거만, 무례 혹은 대적의 태도를 취하는 잘못을 범해 왔다. 우리는 이에 대하여 회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종교와의 대화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전도에서 그 생애나 죽음과 부활에 있어 우리 주님의 유일성을 적극적으로 증거하며, 결코 타협하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

4. 복음과 사회적 책임
신빙성 있는 참된 복음은 변화된 성도들의 삶 속에 현저하게 나타나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을 선포할 때 우리는 사랑의 봉사에 참여해야 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할때 우리는 정의와 평화에 대한 그 나라의 요청에 헌신적으로 응답해야 한다.
우리의 주된 관심은 복음에 있으며,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기회를 갖도록 하는데 있기 때문에 복음 전도가 우선이다.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到來)를 자비와 능력의 역사로 보여주셨다. 오늘 우리도 이와 같이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며, 병자를 돌보며 굶주린 자에게 먹을것을 주고, 갇힌 자들을 살피며, 억울한 자와 장애자를 도와주며, 억압당하는 자들을 구하는일을 해야 한다. 영적인 은사가 다양하고, 소명과 상황이 다르더라도 복된 소식과 선한 행위는 분리할 수 없음을 믿는다.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선포는, 그의 나라에 용납될 수 없는 일에 대하여 예언자적인 지적을 하도록 요청한다. 우리가 개탄하는 악은 제도화된 폭력, 정치적 부패, 사람과 땅에 대한 온갖 형태의 착취, 가정 파괴, 낙태, 마약 유통, 인권의 유린과 같은 파괴적인 폭력을 의미한다. 우리는 가난한 자들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제3세계에 사는 그 많은 사람들이 부채로 인해 고통당하고 있는 사실을 마음 아파한다. 우리는 또한 우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비인간적인 조건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에 분개한다.
그러나 우리들이 계속해서 사회에 관심을 가지며, 그것을 위하여 힘쓴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곧 기독교화된 사회를 의미하는 것처럼 혼동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서적 복음에는 언제나 사회적 적용이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참된 선교는 언제나 성육신적이라야 한다. 참된 선교를 위해서는 겸허하게 그 사람들의 세계에 들어가서 그들의 사회적 현실 비애와 , 고통, 그리고 압제 세력에 항거하며 정의를 위하여 투쟁하는 그들의 노력에 동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희생 없이는 선교가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의 관심과 비전이 작아서 사람들의 공적, 개인적 삶이나 지역적, 세계적 생활의 모든분야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 되심을 선포하지 못했던 것을 회개한다. 우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마 6:33)는 예수의 명령에 순종할 것을 결의한다.


II. 온 교회
온 교회는 온전한 복음을 선포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은 전도의 과제를 함께 나누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 없이는 결실을 얻지 못할것이다.

5. 전도자 하나님
성서는 하나님 자신이 전도의 대장이심을 선포한다. 하나님의 영은 진리와 사랑과 거룩과 능력의 영이시며, 전도는 하나님의 역사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전도자에게 기름을 붓고, 말씀을 확정하고, 듣는 이를 준비시키며, 죄를 책망하고, 눈먼 자에게 빛을 주고, 죽은자들에게 생명을 주고,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믿을 수 있게 하며,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시키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시키며,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과 봉사로 인도하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내보내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이 모든 일에서, 성령이 주로 행하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며 우리 속에 예수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게 함으로써,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다.
모든 전도에는 악의 주관자와 세력에 대항하는 영적 싸움이 있다. 이 싸움에서는, 특히 기도와 더불어 말씀과 성령의 영적 무기로만 승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갱신과 세계 복음화를 위하여 열심히 기도할 것을 호소한다.
진정한 회심에는 언제나 능력의 대결이 있으며, 이 대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한 권위가 드러난다. 믿는 자는 사탄과 죄, 두려움과 허무, 그리고 어두움과 사망의 속박에서 해방되는데 이보다 더 큰 기적은 없다.
지난 날 예수가 행하신 기적들은 그가 메시아라는 것을 보여 주며 온 세상이 그에게 굴복하게 되는 그의 완전한 왕국의 도래를 예상케 하는 표적으로서 특별한 것이지만, 그것이 과거였다 해서 오늘도 살아 역사하시는 창조주의 권능을 제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기사와 이적을 부정하는 회의주의나, 또 그런 것들을 무분별하게 요구하는 무엄함도 모두 배격한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을 거리는 소극성과 또한 우리가 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케 되는 것을 반대하는 승리주의도 배격한다.
우리는 자만하여 우리의 힘으로 전도하려 했던 것과 성령을 지시하려 했던 것을 회개한다.
앞으로 우리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으며, 이 기쁜 소식을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살전 1:5) 전할 것을 다짐한다.

6. 복음의 증인들
전도자이신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고후 6:1)가 되는 특권을 주신다. 하나님 없이는 우리가 증거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으로 우리를 통해서 증거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몇몇 사람들은 전도자, 선교사, 목사가 되도록 부르시면서도 아울러 온 교회가 모든 성도들이 다 증거자가 되도록 부르신다.
특권으로 받은 목사와 교사의 사명은 하나님의 백성(laos)을 성숙한 자로 이끌고(골 1:28) 그들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그들을 양육시키는 일이다(엡 4:11-12). 목회자들은 사역을 독점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받은 은사를 사용하도록 격려하고, 제자 삼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훈련함으로써, 사역을 증폭시켜야 한다. 교역자가 평신도를 지배하는 것은 교회 역사에 있어서 커다란 악이었다. 이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평신도나 교역자들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하고, 또 교역자의 일을 좌절시키고 교회를 약화시켜, 마침내 복음 전파의 방해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근본적으로 비성서적이다. 그러므로 여러 세기 동안 “믿는 자 모두의 제사장직”을 주장해 온 우리는 이제 도 믿는자 모두가 사역자임을 주장한다.
우리는 어린이와 젊은이들이 교회의 예배를 풍요롭게 하고 열심과 믿음으로 전도함을 인하여 감사한다. 제자도와 전도에 있어 그들을 훈련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기 세대의 이웃을 전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은 남자나 여자나 다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로 창조하셨고(창 1:26-27),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이 없이 받아들이시며(갈 3:28), 아들에게나 딸에게나 다같이, 모든 육체에 당신의 성령을 부어 주셨다(행 2:17-18). 그리고 또 성령께서 남자와 같이 여자들에게도 은사를 주시기 때문에, 은사를 활용할 기회가 모두에게 주어져야 한다. 우리는 여성들이 남긴 찬란한 선교 역사의 기록을 찬양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여성들이 그런 역할을 감당하도록 부르신다고 확신한다. 여성들이 어떤 형태의 지도력을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異見)이 있겠지만 세계 복음화를 위해서는 여성도 동역자가 되어야 한다는 데에는 모두 동의한다. 이는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바이며 남자나 여자나, 모두가 적절한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되어야만 한다.
남녀 평신도에 의한 증거는 지역 교회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제 8단락을 보라)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친교를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가정이 없는 자나 직장이 없는 자도 모두 증인이 되라는 명령을 함께 받은 것이다.
우리의 일차적인 책임은 친구, 친척, 이웃, 동료에게 증거하는 일이다. 가정에서의 전도는 기혼자에게든 미혼자에게든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 기독교 가정은 결혼, 성,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표준을 제시해야 할 뿐 아니라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평화의 피난처를 제공해 주어야 하며, 우리의 가정은 복음에 관하여 말할 때에도 교회에는 나가지 않으려는 불신의 이웃이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평신도 전도를 위한 또 하나의 상황은 직장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깨어 있는 시간의 절반을 여기서 보내기 때문이다. 또한 직업이란 하나님의 소명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입술의 언어, 일관성 있는 근면, 정직, 신중성, 직장에서의 정의에 대한 관심 및 특히 다른 사람들이 그들이 하는 일의 내용을 보고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볼 때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평신도의 사역, 특히 여성과 젊은이들의 사역을 실망시킨 일에 대하여 회개한다. 앞으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정당하고 자연스럽게 증인으로서 자기 역할을 하도록 격려할 것을 다짐한다. 참된 전도는 가슴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넘쳐 날 때 이루어진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전도는 예외 없이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속한 일이다.

7. 증인의 성실성
변화된 삶보다 복음을 더 웅변적으로 잘 전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개인의 생활이 복음과 불일치하는 것만큼 복음이 비난을 받게 하는 것은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행동하고, 거룩한 삶을 통하여 복음의 아름다움을 선양하며 복음을 ‘빛나게’해야 한다. 우리를 주시하는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입으로 고백하는 바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있는지 찾고 있는데 이는 너무도 당연하다. 우리의 성실성이 가장 강한 증거가 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죽으셨다는 선포는 영적으로 갈급한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도 우리 자신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할 때, 우리의 공중 예배에 현실성이나 적용성이 결여될 때에는 우리의 증거를 믿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소외된 자들을 서로 화해시킨다는 우리의 메시지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다른 사람들을 겸손히 섬기고, 또한 우리의 공동체를 넘어 어려운 자들을 희생적인 사랑으로 봉사하는 것을 보게 될 대에야 그들 속에서 역사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우리의 도전은 우리 자신이 먼저 이기적인 야심, 부 정직, 탐욕에 대하여 철저히 죽고, 검소하게 자족하면서 너그러운 삶을 살 때에야 비로소 타당성이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 개인의 삶에서나 교회에서 그리스도인다운 언행의 일관성이 없음을 뉘우친다. 즉 우리들 사이에 있었던 물질적인 탐욕, 직업적인 교만이나 경쟁, 기독교 사역에 있어서의 경쟁, 젊은 지도자들에게 대한 시기, 선교에서의 가부장적(家父長的)자세, 상호 책임의 결여, 인종적․사회적․성적 차별 등에 대하여 개탄하는 바이다. 바로 이 모든 세속적인 것들로 말미암아 교회가 세상 문화에 도전하고 그 문화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오늘의 세상 문화가 교회를 붕괴시키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신앙공동체 안에서 말로는 그리스도를 긍정하지만 행동으로는 그리스도를 부정했던 것에 대하여 매우 부끄럽게 생각한다. 우리의 일관성 없는 삶으로 인하여 증거가 신뢰성을 상실하고 있다. 우리에게 계속적인 갈등과 실패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자신과 교회의 성실성을 개발해 나갈 것을 결의한다.

8. 지역 교회
모든 기독교 회중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역적인 표현이며 동일한 책임을 지고 있다. 회중은 하나님께 예배라는 영적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며, 도한 전도로 하나님의 덕을 널리 전파하는 ‘거룩한 나라’이다 (벧전 2:5-9). 이와 같이 교회는 예배하며 증거 하는 공동체요, 모이고 흩어지는 공동체요, 부름 받고 보냄을 받은 공동체이다. 예배와 증거는 불가분의 것이다. 지역 교회의 일차적인 책임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성서를 보면 “우리 복음이너희에게 이르고” 그리고 “너희에게로부터 들린다”(살전 1:5,8)는 순서로 언급되어 있다. 이런 식으로 복음은 교회를 세워 복음을 전하게 하고 이 복음은 다시 계속적인 연쇄 반응 속에서 더 많은 교회들을 세우게 한다. 더 나아가 성서가 가르치는 방법이 가장 좋은 전략이라고 믿는다. 각 지역 교회는 그 처해 있는 지역을 복음화해야 하며 또한 그렇게 할 자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선교에 대한 보다 적절한 전략을 수립하기 위하여 모든 회중이 개교회의 교인들이나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의 모든 특성을 정기적으로 연구할 것을 권한다. 이런 사역을 위하여 교인들은 그 지역 내의 모든 구석구석을 찾아갈 방문단을 조직하여, 사람들이 모이는 특정 지역에도 침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련의 전도 집회, 강좌, 또는 연주회를 마련하거나, 지역의 빈민가를 변화시키기 위하여 가난하나 자들과 함께 일할 수도 있다. 또는 주변 지역이나 이웃 마을에 새로운 교회를 개척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은 온 세상을 향한 교회의 책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선교사를 보내는 교회가 그 교회가 속해 있는 지역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며, 이웃을 복음화 하는 교회가 세계 선교를 소홀히해서는 안 된다.
이런 모든 일에 있어, 각 교회 회중과 교단은 경쟁심을 협동심으로 돌이키도록 노력하면서 가능한 곳에서 다른 교회 및 교단과 더불어 사역해야 한다. 교회는 또한 여러 선교 기관들과도 더불어 일해야 하는데 특별히 전도, 제자 양육, 사회봉사에 있어서는 관계 기관들과 협력해야 한다. 그러한 기관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며 귀하고도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어 교회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한 표징이 되도록 의도하셨다. 즉 인간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의와 평화의 통치 아래 있을 대 어떤 모습일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되어야한다.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달되기 위해서는 개인에 있어서나 교회에서도 복음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함을 통하여 오늘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며(요일 4:12), 특히 작은 모임 안에서 우리의 친교가 표현되고, 여러 공동체들을 분리시키고 있는 인종 차별, 계층, 성, 연령의 장벽을 초월하게 될 때 자신을 계시하신다.
우리의 많은 교회들이 내부 지향적이어서 선교보다는 자체 유지를 위해 조직되어 있고, 전도를 희생시키면서까지 개교회 중심활동에만 몰두하고 있던 것에 대하여 깊이 회개한다. 우리는 교회를 일신시켜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실 때까지(행 2:47)계속 밖으로 뻗어나가는 일에 전념할 것을 결의한다.

9. 전도의 협력
신약 성서에는 전도와 연합이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세상이 그를 믿도록(요17:20)하기 위하여 자신이 성부와 하나 됨 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셨다. 도 바울도 빌립보인들을 권면하여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라” (빌 1:27)고 했다. 이런 성서적 비전과는 달리, 우리가 서로 의심하고 대결하며, 비본질적인것들에 대한 고집, 권력 투쟁과 자기 왕국건설을 힘씀으로 복음전도 사역을 부패시키고 있음을 부끄럽게 여긴다. 우리는 전도에 있어서 협력이 필수불가결한 것임을 확인한다.
첫째,그것이 하나님의 뜻일 뿐 아니라 화해의 복음이 우리의 분열로 인하여 불신을 받기 때문이며 세계 복음화 과제가 기필코 성취되려면 우리가 이 일에 함께 협력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협력’이란 다양성 가운데서 통일성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여러 가지 다른 기질, 은사, 그리고 문화, 지역 교회와 선교 단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함께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제1세계는 선교사를 파송하는 국가들이요, 제 3세계는 선교를 받는 국가들이라고 단순하게 구분하는 단위는 지난 식민주의 시대의 잔재로 단호히 그리고 영원히 지나간 것으로 단정한다. 우리 시대의 새로운 사실은 선교의 국제화이기 때문이다. 지금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 대다수가 비서구인일 뿐 아니라 제3세계 선교사의 수효가 머지않아 서구 선교사들의 수를 능가할 것이다. 구성에 있어서는 다양하지만, 마음과 정신에 있어 하나 된 선교팀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함에 있어서 획기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믿는다.
우리가 온 교회 라고 말할 ‘ ’ 때 우주적 보편적 교회가 복음적인 공동체와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에는 복음주의 운동에 참여치 않는 많은 교회가 있는 것을 알고 있기때문이다. 로마 카톨릭과 정교회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태도는 매우 다양하다. 복음주의자들 중 어떤 사람들은 이런 교회들과도 함께 기도하고, 대화하며, 성서연구를 하고, 함께 일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들과는 어떠한 형태의 대화나 협력도 모두 반대한다. 이런 복음주의자들은 우리 사이에 심각한 신학적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성서 번역, 현안의 신학적 그리고 윤리적 문제들, 그리고 사회사업과 정치적 행동에 대한 연구와 같이 성서적 진리가 손상되지 않는 적절한 영역에서는 협력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전도할 때는 성서적 복음에 대한 같은 태도의 헌신이 요청된다는 것을 명확히 밝히고 싶다.
우리 중의 일부는 세계교회협의회(WCC)에 속하는 교회의 성도들로서 그 협의회가 하는 일에 적극적이면서도 비판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기독교적인 의무라고 믿고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세계교회협의회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들도 있다. 우리 모두는 세계교회협의회가 전도에 대하여 철저한 성서적 이해를 채택하기를 촉구한다.
세계 복음화에 큰 거침돌이 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의 분열에 대하여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음을 고백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신 대로, 진리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계속 추구하여 나아갈 것을 결의한다. 보다 밀접한 협력을 향해 나아가는 바른 길은 우리와 같은 관심을 가진 모든 사람들과 성서에 기초하여 솔직하게, 인내심을 가지고 대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기쁘게 헌신한다.


III. 온 세상
온전한 복음이 온 세상에 알려지도록 온 교회에 위탁되어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보냄을 받은 이 세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0. 현대 세계
전도는 진공 속에서가 아니라 현실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복음과 상황 사이의 균형을 조심스럽게 유지하여야 한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그 상황을 이해해야 하지만 그러나 상황이 복음을 왜곡시키게 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고학 기술과 함께 산업화되어 가며, 경제 질서의 변화와 함께 도시화되어 가는 새로운 세계 문화의 출현이라는 “현대성”(modernity)의 영향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요인들이 복합되어 환경을 조성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게 한다. 더욱이 세속주의는 신앙을 황폐케 하여 하나님과 초자연적인 사실들을 무의미하게 만들었고 도시화는 사람들의 삶을 비인간화하였으며 대중매체는 말을 영상으로 대체하여 진리와 권위의 가치를 하락시키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결국 이런 복합적인 요인으로, 현대화의 결과는 많은 사람들이 애써 전하는 메시지를 왜곡시키며, 또 선교에대한 동기유발을 해친다.
1900년도에는 세계 인구의 9%만이 도시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2000년에는 50%이상이 도시에 살게 될 것이다. 세계 각처에서 사람들이 도시로 이주하고 있으며 이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이주’라고 불려 왔다. 이런 현상은 기독교 선교에 주요한 도전이 되고 있다. 한편 도시에는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여러 민족이 우리의 문턱에까지 와 있는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복음으로 민족의 장벽을 분쇄하는 우주적 교회들을 발전시킬 수 있지 않겠는가? 다른 한편, 많은 도시주민들은 가난한 이주민들로서, 복음을 잘 받아들인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와 같은 도시 빈민 공동체 속으로 다시 들어가 그 사람들을 섬기며 도시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현대화는 위험과 함께 축복을 가져오기도 한다. 전 세계를 연결하는 통신망과 교역망을 통하여 현대화는 전통적 사회이든지 전체주의적 사회이든지 복음이 미개척지 경계를 넘어 그닫힌 사회 속에 파고들어 갈 수 있는 전대미문의 문을 열어 놓고 있다. 기독교 매체들은,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일에나, 토양을 준비하는 일에나, 막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주요선교 방송국들은 2000년도까지는 모든 주요 언어로 라디오를 통하여 방송 전도 할 것을 계획하고 있다.
우리는 현대화 문제를 이해하기 위하여 마땅히 해야 할 만큼 노력하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우리는 현대적 방법과 기술들을 무비판적으로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이 세속성에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러한 도전과 기회를 심각하게 다루어, 현대의 세속적 압력에 대항하고,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현대의 모든 문화와도 연관시켜, 현대 사회에서 세속화되지 않으면서, 현대 선교에 매진할 것을 다짐한다.

11. AD 2000년과 그 이후의 도전
오늘날 세계 인구는 60억에 육박하고 있다. 전 세계 인구의 3분의1이 명목상으로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다. 나머지 40억 중 절반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들었으며 그 나머지 반은 듣지도 못하고 있다. 이러한 자료에 비추어, 우리는 다음의 네 가지 범주의 사람들을 고려함으로써 우리의 복음화 과제를 평가한다.
첫째로, 잠재적인 선교 역군으로, 헌신된 사람들이다. 세기에 있어 이러한 범주에 속하는 기독교 신자들이 1900년에는 4천만이었는데 오늘날에는 5억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지금은 다른 어떤 주요한 종교 그룹보다 두 배 이상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둘째로, 헌신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 고백한다 (그들은 세례를 받고, 교회도 가끔 참석하며 자신들이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있어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인 헌신이란 개념은 생소하기만 하다. 이런 사람들은 전 세계의 어느 교회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이들을 시급히 재복음화해야 한다.
셋째로, 비복음화된(unevangelized)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복음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이 복음에 응답할 수 있는 적절한 기회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다. 아마도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의 거리, 길, 마을, 촌락에 가면 만나 전도할 수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넷째로, 미복음화된(unreached)사람들이 있다. 예수께서 구주되심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사람이 20억이나 되는데, 이들은 자국(自國)의 그리스도인들이 접촉할 수 있는 영역 안에 있지 않다. 사실 약 2000여 민족들 가운데서도 아직도 활발한 토착적인 교회 운동이 일어나고 있지 않다. 여기에서 “민족”이란 서로 유사성(예를 들면 공통된 문화, 언어, 가정, 직업)을 가진 종족(people group)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복음 전달자는 이미 그들의 문화에 속하고 그들의 언어를 아는 신자들일 것이다. 그것이 불가능하면, 다른 문화권에 속하는 복음의 사자들이 가야만 하며 이들은 자기의 문화를 떠나, 전도하려는 민족들과 자신을 동일화하여야 할 것이다.
현재 2,000여 개의 큰 민족들 속에 그와 같은 약 12,000여 개의 “미복음화 소수민족”이 있으며 그들을 전도한다는 과제는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현재 전체 선교사의 겨우 7%만이 이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나머지 93%는 세계의 절반이 되는 지역, 곧 이미 복음화된 지역에서 일하고 있다. 이와 같은 불균형을 시정하려면 선교 인력을 전략적으로 재배치해야 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이 모든 범주의 선교에 있어서 한 가지 방해 요인은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많은 국가에서 그 나라에 기여할 만한 일이 없으면 선교사로 입국코자 할 때 입국사증을 발급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지역들에 절대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는 말은아니다. 우리의 기도는 어떤 휘장도, 문도, 장벽도 뛰어 넘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라디오나 텔레비전, 오디오나 비디오 카세트, 필름이나 책자를 통해서는 그런 지역까지도 미칠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과 같이 스스로 생계를 꾸려 나가는 소위 “자비량(自備糧)선교사”(tent makers)는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들은 직업과 관련하여(예를 들면, 상인, 대학교수, 전문 기술인, 어학 교사)여행하며, 가능한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직업상 정당하게 가는 것이기 때문에 속임수를 써서 다른 나라에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 그자체로써 증거가 되기 때문에 전도는 자연히 되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 거의 2000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세계 인구의 2/3가 예수를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심히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가망성이 없어 보이는 곳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힘 있게 일어나고 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서기 2000년은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도전적인 이정표가 되었다. 2000년 시대의마지막 십 년 동안 세상을 복음화 하는데 우리 자신을 헌신해야 하지 않겠는가? 날짜에는 마술적인 것이 있을 수 없지만 우리가 이 목표 달성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신다. 이 과업은 긴급하다. 우리는 기쁨으로 희망을 가지고 그리스도께 순종할 것을 다짐한다.

12. 어려운 상황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반대를 예상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는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 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요 15:20)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핍박에 대해 기뻐하라고까지 말씀하시며(마 5:12) 열매를 많이 맺으려면 죽어야 한다는 사실(요 12:24)을 상기 시켰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불가피한 것이며 고난은 열매를 낳을 것이라는 예언은 모든 시대의 진리였고, 우리 시대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순교했다. 오늘날의상황도 이와 다를 바 없다. 우리는 글라스노스트(glasnost)와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가 소련과 다른 동구권 국가들에게 완전한 종교적 자유를 가져오고, 회교 국가들과 힌두교 국가들도 복음에 대하여 좀더 개방적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우리는 최근에 일어난 중국에서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잔혹한 억압에 대해 탄식하며, 그 억압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많은 고난을 가하게 되지 않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고대 종교들은 복음에 대한 관용에 있어서 더 인색해지며 추방된 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등 세계는 복음에 대해 점차 냉혹해져 가는 것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 기독교 신자들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재고하고 있는 정부들에 대해 아래의 세 가지를 밝히고자 한다.
첫째로,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의 안녕을 추구하는 충성스러운 시민이다. 그들은 지도자를 위하여 기도하며 세금을 납부한다. 물론 예수를 주로 고백해 온 사람들이 다른 권력자들을 주라고 부를 수는 없다. 만일 그리스도인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하거나 또는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을 행하도록 강요한다면 그 명령에는 불복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은 양심적인 시민이다. 그들은 결혼 생활과 가정생활을 안정시키며, 그들의 업무에 정직하고 근면하며, 그리고 장애자의 곤경에 처한 자들을 돕는 일에 자발적으로 활동함으로써, 국가에 안녕에 기여한다. 공의로운 정부는 그리스도인들을 경원할 필요가 하나도 없다.
둘째로, 그리스도인들은 전도에 있어서 비열한 방법을 거부한다. 신앙의 본질상 우리는 복음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 하지만, 그 전도를 공개적으로 정직하게 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복음에 대해 온전히 자유롭게 결단하게 한다. 우리는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 대하여 민감하길 바라며, 그들의 개종을 강요하는 어떤 방법도 거부한다.
셋째로, 그리스도인은 기독교에 대한 자유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모든 사람들이 종교의 자유를 갖기를 간절히 바란다. 기독교가 우세한 국가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앞장서서 다른 소수 종교를 위하여 자유를 요청하고 있다. 그러므로 비기독교 국가의 그리스도인들은 비슷한상황에 처한 다른 종교인들을 위한 자유 이상으로 자신들의 자유를 요청하고 있다. 그러므로 비기독교 국가의 그리스도인들은 비슷한 상황에 처한 다른 종교인들을 위한 자유 이상으로 자신들의 자유를 요구하고 있지는 않다. 세계인권선언(The Universal Declaration ofHuman Rights)에 정의된 바대로 종교를 ‘고백하고, 실천하고, 전하는’자유는 분명히 상호인정할 수 있는 권리이며 또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우리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비열한 방법으로 전도하여 죄를 지었다면, 이에 대하여 깊은 유감을 표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불명예스럽게 되지 않도록 어떠한 일에도 불필요한 공격을 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그러나 십자가를 공격하는 것을 회피할 수 없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는 하나의 은총으로 고난도 받고 죽을 준비가 되어있기를 위해 기도한다. 순교는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귀히 여기겠다고 약속하신 하나의 증거형태이다.

결론 : 그리스도께서 오시 때까지 그를 선포하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그를 선포하라.” 이것이 제 2차 로잔대회의 주제이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가 이미 오셨음을 믿는다. 그 분은 아구스도가 로마의 황제였을 때 이 땅에 오셨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바, 그 분의 약속대로 어느 날 그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하여 상상할 수 없는 영광 속에 다시 오실 것이다. 우리는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이 초림과 재림 사이의 간격은 기독교 선교 활동으로 채워져야 한다. 우리는 복음을 가지고 땅 끝까지 가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주님은 그렇게 할 때에야 이 시대의 종말이 오리라고 약속하셨다. 두 가지의 마지막(곧 시간과 공간의 우주 종말)이 동시에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주님은 우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기독교 선교는 긴급한 과업이다. 우리는 선교를 위한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모른다. 분명 허비할 시간은 없다. 그리고 우리의 의무를 시급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리가갖추어야 할 것이 있는데 특히, 연합(함께 전도해야 한다)과 희생(복음화를 위한 대가를 알고 또 치러야 한다 , )이 필요할 것이다. 로잔에서 우리는 온 세상의 복음화를 위하여 함께 기도하고, 계획하고, 일할 것을 언약했다. 마닐라에서 우리는 온 교회가 온 세상에 온전한 복음을 가지고 나아가 하나가 되어 희생적으로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긴급하게 그리스도를 선포할 것을 선언하는 바이다.

출처 : http://www.davidcho.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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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서문

  1983년 6월의 2주 동안, 30개국의 개교회와 기독교 선교기관과 원조단체들로부터 온 우리는 미국 휘튼대학에 모여 인간의 요구에 부응하는 교회의 과업에 대해 기도하고 상고하였다.  우리들 가운데 일부는 빈곤과 무력감과 억압이라는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 주변화된 사람들 사이에 위치한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세계의 풍요한 지역에 위치한 교회에서 왔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로 하여금 서로의 삶을 나누며, 소집단으로 성경을 공부하고, 인간개발과 변혁에 대한 논문들을 고찰하며, 인간 필요에 대한 다양한 반응을 기술해 놓은 사례연구와 역사의 시사점들을 깊이 있게 살펴볼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신데 대해 깊이 감사드린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기에, 우리는 서로의 도움에 부응하는 길을 찾았다(출3:7-9 ; 약5:1-6). 우리는 괴롬당하는 하나님의 세계와 교회의 일부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뜻과 계획에 관하여 성령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오시고 계신다고 믿는 것이 거기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뻐한다.
  고통을 경감시키고 또 서로 손잡고 고통의 원인을 해소하라는 거대한 도전이 각처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 앞에 있는 것을 본 우리는 예수님 복음의 자유케 하고 치유하시는 능력을 그 어느 때 이상으로 인식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세상의 평화이시라는 우리의 확신을 기꺼이 재확인한다. 그것은 오직 그분만이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모든 원수된 것을 끝내실 수 있으시기 때문이다(엡2:14-17).
  나아가 우리는 오직 복음을 전파함으로써만 인류의 가장 기본적인 필요-하나님과 교제하는 것-가 채워질 수 있음을 인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전도를 하나의 별개의 주제로 강조하지 않는다. 그것은 전도를 인간의 요구에 대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총체적 부응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여기기 때문이다(마28:18-21). 덧붙여서 로잔언약과 전도와 사회적 책임간의 관계에 관한 협의(CRESR, Grand Rapids, 1982) 보고서가 이미 표명한 것을 단순히 반복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우리는 우리가 발견한 것을 전세계의 형제 자매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우리가 이 성명을 내는 것은 최종적인 말을 하려 함이 아니라 우리가 고찰한 내용을 요약하려는 것이다.
  성령의 가르침을 받은 성경과 경험 양자는 둘 다 하나님의 백성은 인간의 필요에 직면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지혜에 의존해야 함을 강조한다. 따라서 개교회나 선교단체가 목회와 선지자 역할을 둘 다 하기 원하면 지혜롭게 행동해야 한다. 실로 착각과 분열에 빠져 있는 모든 인류에게 그리스도가 그들의 구주와 왕뿐 아니라 지혜가 될 필요가 있다.
  신자의 마음속에 있는 성령의 역사를 증폭시켜 사회에 영향을 미치게 하는 성경적 변혁관을 찾아내려는 우리의 노력을 의식하고 있는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분별력을 주시도록 기도한다. 우리는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는 학문적이기보다는 실제적이요 엘리트들의 영역이기보다는 신실한 자들의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갈등으로 가득한 세상의 일부로서 그리고 싸움으로 쉽게 갈라지는 교회의 일부로서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이 문서에 표명된 확신들이 하나님의 보다 순결하고 평화로운 지혜에 의하여 더 정제되기를 원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우리의 말이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통해 그들 자신의 사고에 도움을 받고 또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58)라는 말씀을 따르는 데 격려가 되기를 기도한다.

.  그리스도인의 사회개입
 
  1.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를 상고할 때는 종종 유치하게 낙관적으로 되거나 암울하게 비관적으로 되려는 유혹을 받는다. 일부는 이상주의적 비전에 고무 받아서 하나님의 나라가 그 모든 충만가운데 이 땅 위에 세워질 수 있다고 시사하는 것 같다. 우리는 이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개인의 죄와 사회의 죄가 실재하며 만연함을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사 1:10-26 ; 암2:6-8 ; 미2:1-10 ; 롬1:28-32). 따라서 우리는 이상주의는 단지 헛된 꿈에 불과하다고 여긴다(CRSER보고서 , IV.A).
  2.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증가하고 있는 빈곤과 불행, 좌우익 진영의 권력들에 의한 흉악한 억압과 착취, 핵전쟁의 위협과 함께 상승작용을 하고 있는 폭력 등의 현실에 직면해 있기 때문에 비관적으로 된다.  그들은 행성 지구가 자원의 낭비 때문에 오래가지 않아 거기 사는 인구를 지탱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가능성이 증가되는 데 대해 지나치게 관심을 쏟고 있다.  그 결과 그들은 눈을 이 세상에서 돌려, 지금 이곳에서의 곤란이 끝나게 될 그리스도의 재림만을 오로지 주목한다. 우리는 이런 종말관을 가진 그리스도인 계열이 백년 이상 동안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나라에서 의료 및 교육사업으로 크게 기여한 사실을 무시하거나 축소시키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중 일부는 이러한 사람들이 교회의 과업을 사나운 바람에 조난 당한 중에 생존한 자를 구출하는 일로만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고 느낀다. 우리는 이 견해도 지지하지 않는다. 그것은 약한 자의 송사를 보호하고 가난한 자와 억압당하는 자들의 권리를 지켜 주며(시 82:3), 정의와 사랑을 행하라(미6:8)는 성경의 명령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3.  나아가 우리는, 우리의 소명이 오직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요 정치 및 기타 활동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을지라도, 우리의 비개입이 현질서에 대한 무언의 지지가 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우리는 사회의 악한 구조에 도전하거나 그것을 지시하거나 한다. 그 외의 길은 없다.
  4.  그리스도인들이 핍박과 억압에 직면해서 사회로부터 떠남으로서 현상태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였던 일이 교회 역사상 많이-그리고 현재에도-있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혹독한 억압 아래서도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에 도전할 수 있고 나아가 그들의 생활양식, 비이기적 사랑, 조용한 기쁨, 내적 평안, 인내로 견디는 고통 등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벧전 2:21-25).
  5.  따라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이런 저런 방법으로 사회의 가치관에 동조하지 말고 변화시키라는 부름을 받고 있다(롬 12:1-2 ; 엡5:8-14). 이러한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며 세계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우리의 고백에서 나온다. 사탄이 이 세상에서 활동하면서 그것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사실이다(눅4:5-7). 그러나 사탄은 아무런 고유 권한도 없는 찬탈 자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는 그리스도 예수께 주어졌다(마28:18 ; 골1:15-20). 비록 그의 주님되심이 아직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지만(히2:8), 그는 여전히 세상 왕들의 통치자요(계1:5), 만왕의 왕과 만주의 주(계19:16)이시다.  믿음으로 우리는 옛 질서가 지나가고 새 질서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고백한다(고후 5:17 ; 엡2:7-10 ; 마12:18 :눅7:21-23).

.  개발 뿐만 아니라 변혁을
  6.  이 회의에 참가한 사람들은 개발에 관한 현재의 논의에 들어갔다. 대부분의 서구정치 및 사업 지도자들에게는 개발이 국가들과 국민들이 현존 국제 경제 질서의 일부가 되는 과정으로 이해되고 있다. 제3세계의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개발주의(developmentalism)라는, 이념적으로 동기화된 변화 과정으로 정의된다. 이 과정은 본질적으로 빈곤과 불의의 구조적 상황을 부시하고 종속과 불평등을 증가시키는 경향이 있는 경제적 성장을 기계적으로 추구하는 것과 관련된다.
  7.  그렇지만 우리들 가운데 일부는 아직도 개발이, 성경의 온전한 메시지에 비추어 재해석되면, 그리스도인들이 간직해야 할 개념이라고 믿는다. 이런 선택을 하는 부분적 이유는 이 단어가 매우 널리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용어를 변경하면 불필요한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
  8.  이 협의에 참가한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성경 적인 사고 범주와 연계시키기가 어렵기 때문에, 또 그 부정적인 느낌 때문에 개발이란 말을 다른 말로 대치하고 싶어한다. 우리가 제안하는 대안이 변혁(transformation)이다. 그것은 이 단어가 다양한 방법으로 모든 상황에 적용될 수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구 국가들은 일반적으로 개발이 자기들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가정해 왔지만, 많은 면에서 변혁을 필요로 하고 있다. 특히, 개인이 가장 자유롭게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때 사회가 가장 잘 운용된다는 무언의 가정은 청지기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기초하여 도전 받을 필요가 있다(눅 12:13-21, 16:13-15 ; 빌2-4). 공동체적 결속을 기초로 집단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유의 사회들이 그들 존재의 빈곤을 깨닫도록 도울 수 있다.
  9.  더구나 변혁이란 용어는 개발과는 달리 미심쩍은 과거가 없다. 변혁은 가난한 사람들이 창조시 그들에게 주어진 정당한 권리를 향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많은 사회에서 일어나야 할 일단의 변화들을 지적하고 있다.
  10.  하지만 우리들은 변혁의 목표와 과정 둘 다 메시아 예수님에 대한 기쁜 소식에 비추어 관찰되어야 한다는 데 관심이 있다. 우리는 흔히 좋은 사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결정하는 세속주의의 문화적 사회적 영향력을 배격하고, 도 다른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하도록 촉구한다. 우리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서 유리된 관념이, 종종 한 국가를 위해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우리의 의견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성경 자체의 메시지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고 믿는다.
  11.  인간의 삶에 대한 성경의 견해에 의하면, 변혁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목 하는 가운데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상태와 반대되는 인간 생존 상태로부터의 변화이다(요10:10 ; 골3:8-15 ; 엡4:13). 이 변혁은 개인과 지역사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은 사람들을 죄책감과 죄의 능력, 죄의 결과로부터 해방시키고,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반응할 수 있게 하여(롬 5:5), 그리스도 안의 새 피조물(고후 5:17)이 되게 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변화시킨다.
  12.  성경에는 우리가 변혁을 이해하는 방법에 초점을 맞추도록 돕는 주제들이 많이 있다. 창조론은 모든 남녀노소의 가치와 자연 자원을 보살피고9창1:26-30) 그것을 이웃과 평등하게 나누어야 하는 인류의 책임을 이야기한다. 타락론은 탐욕과 불안정과 폭력과 권력에 대한 욕망의 결과를 통해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인류의 선천적 성향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롬2:2). 속죄론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를 선포하는데, 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이야기하며 원수된자들 사이에 화목을 가져오고, 또 착취당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정해진 정의를 찾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림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드려지는 생활 방법을 위한 것이다.
  13.  우리는 변혁의 목적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성경의 비전에 의해 가장 잘 묘사됨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만유의 주께 복종하는 인간이 되는 이 새로운 길은 많은 측면을 가지고 있다. 특히 이것은 편견과 두려움 및 다른 사람에 대한 선입견들을 극복함으로써 개인들, 인종들, 국가들 사이에 평화를 가져 오려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식량, 물, 치유수단 및 지식 등과 같은 기초 자원들을 나누어 갖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의사 결정에 더 많이 참여하도록 하여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고 자신이 주는 것을 똑같게 하는 일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성령의 역사와 서로서로에게 의존하는 사람들의 집단으로서 범사에 그리스도에 이르도록 성장하는 것을 뜻한다.

.  피조계의 청지기직

  14.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 토지는 다 내것임이라(레 25:23).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에 하나님의 대표자들로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을 지혜롭게 돌볼 책임을 부여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들의 책임의 완전한 의미를 더디 깨닫는다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당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단지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그것을 관리하고 개선할 다름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 자주 하나님의 자연자원을 무분별하게 사용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종종 우리는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와 광물자원의 보존, 소멸 위기에 처한 동물의 보존, 수많은 천연 서식처의 불안정한 생태균형의 보존 등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땅은 모든 세대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아프리카 속담에서는 부모가 자녀들에게서 현재를 빌렸다고 말한다. 우리의 현재 삶과 자녀들의 미래는 우리가 온 땅을 지혜롭게 평화롭게 다루는데 달려 있다.
  15.  또한 우리는 우리의 소득과 부의 작은 부분, 십일조만이 하나님께 속하고 나머지는 우리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우리 소유라고 가정한다. 이런 자세는 다른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들고 청지기로서의 우리의 정체와 역할을 부인하게 한다. 우리는 모든 곳의 그리스도인들, 특히 풍요롭게 이 생에서 좋은 것들(눅16:25)을 향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기본적 필요가 충족되게 하라는 명령을 충실히 복종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렇게 하면 현재 가난한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16.  구원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 및 다른 사람들로부터 고립된 상태에서 건져 올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세계적 공동체 안에 두셨다. 한 몸에 속하였다는 것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선물을 나누어서 모든 지체들 사이에 평등함이 있게 하는 것이 포함된다(행 2:42-47).
  17.  개인이나 국가가 절대적인 소유권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가난한 자들도 하나님의 자원에 대해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다(신 15:8-9). 변혁의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청지기로서 정의를 행하여 자원을 재분배하고 탐욕의 결과를 제한하기 위해 기도와 본을 주장과 항거를 통해 함께 애쓰는 것이다(행 4:32-5:11)
  18.  우리는 엄청난 양의 자원을 현재의 무기경쟁에 그릇 사용함으로써 불안을 겪고 있다. 수백만이 굶어 죽고 있는데도 자원은 갈수록 더 정교한 핵무기를 연구하고 생산하는데 낭비되고 있다. 나아가 끊임없이 증가하는 재래식 무기교역은 국민의 기초적인 필요마저도 무시하는 억압적인 정부의 번창에 수반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러한 불의와 침략행위의 새로운 양상을 정죄하며 정의와 화평을 추구할 것을 다짐한다. 이제까지 논의한 피조계에 대한 청지기직 문제에 비추어 보면서, 우리는 전세계의 복음주의 공동체들에게 핵과 무기 교역 문제에 기도하는 자세로 관심을 가질 것과 그것을 연구와 행동 과제에 넣을 것을 촉구한다.
.  문화와 변혁
  19.  문화에서 일정한 시기에 특정 지역 또는 환경에 있는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세계관, 신념, 가치관 예술양식, 습관, 법, 사회경제 구조, 사회적 관계, 물질 등이 포함된다.
  20.  문화는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곳의 사람들을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창조주이신 그분은 우리를 창조적으로 되게 만드셨다. 이 창조성이 문화를 만들어 낸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이 창조하신 것들의 청지기로 위임하셨다(시 8편 ; 히 2:5-11). 모든 선한 은사가 위에서 말미암고 모든 지혜와 지식이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므로, 문화에 있는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어느 것이든지 하나님의 선물(은사)로 보아도 된다(약1:16-18). 또한 복음을 듣고 순종한 곳은 어디든지 문화가 더욱 고상해지고 풍요로워진다.
  21.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께 거역하므로 범죄 하였다. 따라서 우리가 만들어 내는 문화는 악으로 오염되어 있다. 우리 문화의 여러 측면들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사회구조와 관계들, 예술양식과 법은 종종 우리의 포악함, 상실감, 일치된 도덕적 가치의 상실 등을 반영하고 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이 세상이 그 창조주로부터 소외되어 있으므로 이 세대(세상)를 본받지말라고 도전한다(롬12:2). 우리는 문화가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것을 다시 나타낼 수 있도록 변혁시킬 필요가 있다(롬 12:2).
  22.  따라서 문화에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과 마귀의 영향력, 그리고 인간 착취의 기제들에 대한 표지가 나타나 있다. 우리의 문화 창조성에서 하나님과 사탄이 충돌한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신약을 주시기 위해 그리스 문화를 사용하셨다. 그렇지만 주님은 이와 동시에 그 문화를 복음의 심판에 복종케 하셨다.  우리도 역시 문화를 감사하며 사용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것들을 복음의 빛으로 검토하여 그 안에 있는 악을 폭로해야 한다(고전 9:19-23).
  23.  착취하고 비인간화시키는 사회구조는 교회가 적절히 저항하지 않는 죄를 조장한다. 수많은 교회들과 선교회 그리고 기독교 구호 및 개발 단체들이 사회정치적 현상태를 지지하거나, 침묵으로 묵시적 지지를 보여 주고 있다.
  24.  우리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성경의 적용을 통해 모든 사회문화적 상황들의 진실을 분별하고자 한다. 우리는 인간 문화에 대한 기능주의와 갈등론적 접근 양자로부터 비판적으로 배울 필요가 있다. 기능주의 사회인류학적 접근은 다양한 문화들의 조화로운 측면들을 강조하며 현존 구조에 대한 관용적 태도를 지지한다. 이 입장은 종종 과학적 객관성이라는 이름으로 채택된다. 반대로 갈등론적접근은 사회구조의 모순적 성격을 노출시키며, 우리로 하여금 이익들에 내재하는 갈등을 인식하게 한다. 우리는 두 접근법 모두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25.  우리 본성 속에 있는 갈등적인 윤리 성향들을-이것은 우리의 문화체제들에서 드러난다-생각할 때, 우리는 순진하게 낙관적으로 되지도 말고 판단하는 그릇된 자세를 갖지도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사회의 변혁을 위해 하나님과 동역을 추구하는 새로운 공동체로, 사회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마 5:13-16). 우리는 사람들과 그 문화를 그리스도의 주재권 아래로 가져오기를 추구한다. 우리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께서 자기 나라를 완성하기 위해 다시 오실 때에 사람들이 누리게 될 보다 정의로운 공동체 안의 그 자유와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계 21:1-22:6).

.  사회 정의와 자비
  26.  우리 시대는 다같이 우리로 하여금 빈곤이 필요악이 아니요 종종 불의와 착취와 억압으로 특징 지워지는 사회, 경제, 정치, 종교 체제의 결과일 따름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세계에는 약8억 명이 빈곤에 처해 있으며, 그들의 비참한 상태는 종종 부유한 자와 힘있는 자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악은 인간의 마음에 있을 뿐 아니라 사회 구조에도 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자비하시며 악을 미워하시고 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현재의 환경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자비롭게 행동하고 정의를 추구하는 일에 헌신할 것이 긴급하게 요구된다. 교회의 사명에는 복음의 선포와 그의 시범 둘 다가 포함된다. 다라서 우리는 전도해야 하며, 사회 변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수단은 우리가 바라는 목적과 일치해야 한다.
  27.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과업을 생각하면서 에수님께서 당시의 권력 구조에 대해 가지신 태도를 고찰했다. 예수님은 열심당원도 아니셨고 자기 백성에 대한 억압을 수동적으로 구경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동정심에 마음이 움직여서, 가난한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였으며, 그들을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것으로 보셨다(마9:36). 예수님은 자신의 자비로운 행동과 가르침, 생활방식을 통해 사회의 불의를 폭로하셨고 사회 지도자들의 자기 의를 정의하셨다(마 23:25 ; 눅6:37-42). 예수님의 자세는 선지자적 동정이었으며,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받아들여 로마와 유대 기존 질서와 상반되는 입장을 취한 한 공동체를 형성하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는 그의 동정이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음을 상기하면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라는 도전을 받았다(요 13:12-17 ; 빌2:6-8 ; 요일3:11-18).
  28.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가난한 자들과 동일시하는 일에는 국내든 국외든, 또는 동서남북 어디든, 언제나 큰 희생에 따르며, 또 그것이 우리를 핍박과 죽음에까지 이끌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는 것을 알고, 복음을 위하여 우리의 편안함, 우리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맡길 수있게 되기를 겸손히 하나님께 구한다.
  29.  이따금씩 우리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사역을 하면서 심각한 곤경에 처한다. 즉 우리의 자선 행위를 그들의 운명 개선에 국한시켜야 하느냐, 아니면 그 이상 나아가 그러한 자선행위를 필요하게 만드는 불의를 교정하려고 해야 하느냐 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다. 후자는 우리가 사역을 계속하는 데 필요한 자유를 위험에 처하게 한다. 어떤 경험법칙도 없지만 다만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자비와 정의는 같은 것에 속함이 분명하다(사 11:1-5 ; 시 113:5-9). 따라서 우리는 우리 사역에 양자를 결합시키기 위해 가능한 모든 노력을 해야 하며 기꺼이 그 결과를 감내 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자선 행위는 사회 정치, 경제적 구조와 관계에 있는 불의를 지적하여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로 하여금 권세를 잡은 자들에 대항하게 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행 4:5-22).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하여 우리는 정의를 위하여 고난 당하는 자들과 함께 해야 한다(히 13:3).
  30.  우리의 정의와 치유사역은 동료 그리스도인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의 사랑과 헌신은 이방인들에게까지 미쳐야 한다(마5:43-48). 우리가 이방인의 일에 개입하는 것은 자선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경제적 정치적 행동을 통해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가난한 자들을 향한 정부의 법과 정책은 그 특징이 정의여야 한다. 우리의 경제적 정치적 행동은 전도와 분리될 수 없다.
  31.  현대 세계의 불의는 세계적인 규모에 이르렀다. 우리들 중 다수는 국제적인 기업에 지배받는 나라 출신이고, 일부는 정치체제가 그 국민을 책임지지 못하는 나라 출신이다. 우리는 이러한 경제적 정치적 제도가 국민들, 특히 가난한 자 중 가장 가난한 자들에게 미치는 해악을 목격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의 형제 자매들에게 이런 상황을 심각하게 연구하고 억압당하는 자들을 위한 변화를 일으키는 방법을 찾을 것을 촉구한다.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잠 29:7).

.  개교회와 변혁
  32.  개교회는 기독교 집단의 기본 단위이다. 신약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주님으로 인정하며, 개인적으로와 공동체적으로 천국의 가치관을 나타내 보이는 것을 통해 예수님의 섬김의 사역을 구현함으로써, 변혁을 체험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막 10:34-45 ; 벧전 2:5,4:10). 오늘날도 변혁된 삶을 사는 이와 유사한 예가 전세계의 교회에 무수하게 달려 있다.
  33.  우리는 개교회가 대대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달하는 도구가 되어 왔으며, 그들의 일차적 역할은-비록 유일한 역할은 아닐지라도-삼중 사역, 즉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찬양, 말과 행위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삶에 영접한 사람들을 양육, 교육, 제자화 하는 일-이었음을 인정한다. 이렇게 하여 변혁이 그리스도인 개인, 가족, 공동체에 일어난다. 그들은 말과 행동으로 윤리적, 도덕적, 사회적 변혁의 필요성과 실제를 나타내 보인다.
  34.  모든 교회는 종종 사회의 악을 공개적으로 공격해야 할지 아니면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아야 할지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선다. 어떤 선택을 하든 목적은 교회의 사역을 완수하기 위해 교회의 주님께 순종하려는 것이어야 한다. 교회는 경솔히 말하여 그 증거가 비효과적으로 되게 하거나, 말해야 할 때 침묵함으로 그 선지자적 소명을 부인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지혜가 필요하다(벧전 3:13-17). 만일 우리가 성령께 민감하고 사회적 의식이 있으면, 늘 사회문제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재평가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눅 18:24-30).
  35.  개교회 지체(구성원)들의 태도와 생활방식 변혁을 위해서는 정직, 지도력, 지식이 필수적이다. 교회는 이웃 사람들이 돈을 쓰는 방법 때문에 삶에 압력을 받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종종 자기 나라와 다른 나라의 고난과 인간의 필요보다는 이것을 더 의식한다. 그들도 역시 가끔씩은 세계적 필요를 체험하거나 그들의 안일에 도전하는 정보를 접하기를 꺼린다. 만일 교회의 지도자가 못한다면, 교회 지체들은 종종 이런 문제들을 간과하게 될 것이다(딤전 3:1-7 ; 히 13:17).
  36.  우리는 개교회내의 필요에 민감하고 부응해야 한다. 과부, 갇힌 자, 가난한 자, 이방인 등은 특히 개교회가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이다(갈 6:10). 우리는 지역 주민의 필요를 잘 알고 그러한 필요를 채우는 데 있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비록 우리 교회의 지체는 아니지만 동일 지역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섬기기를 추구해야 한다(약 1:27 ; 롬12:17).
  37.  우리 교회는 지역사회와 그 이상의 사회에 있는 악과 사회 불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가 취하는 방법은 연구, 진지한 기도, 성경에 제시된 그리스도인 행위의 규범적, 윤리적 지침내의 행동 등이다. 정치체제가 어떻든 때로는 이러한 지침내의 항거가 효과적일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항거하는 문제와 방법을 세심히 생각하여 교회의 정체와 메시지가 더럽혀지거나 유실되지 않게 하여야 한다.
  38.  그렇지만 개교회는 우주 교회의 일부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서로 다른 지역과 환경 속에 있는 교회들 사이에 교제(koinonia)에 기초한 도움과 나눔(diakonia)이 진정으로 필요하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세계의 서로 다른 지역에 있는 교회들을 연결시키는 모델을 생각하였다. 이러한 교회간 짝짓기에서는 상호관계가 어떤 형태의 온정주의도 아닌, 양편에서 주고받는 진정한 호혜관계여야 한다(롬 15:1-7).
  39.  모든 개교회가 늘 환경과 타협할 가능성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진정한 상호관계의 정신 가운데 호혜적 관계를 갖는 것이 특별히 필요하다(롬 12:3-18). 어떤 교회는 물질주의와 인종주의의 문제에 빠져 있고, 다른 교회들은 억압과 폭력의 문제에 빠져 있다. 우리는 형제 자매의 눈으로 세계를 보려고 시도함으로써 피차 도울 수 있다.
  40.  보다 광범위한 세계 지역사회에 관해서, 기독교 교회는 개인적 특성, 훈련, 그리스도인 성장 등에서 그리스도와 파송 교회의 이름 하에 타문화에서 일할 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을 찾고 교환해야 한다. 이런 사람들은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특징 지워지는 종과 청지기로 가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그들이 간 나라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과 동역 하게 될 것이다.
.  기독교 원조 단체와 변혁
  41.  우리는 인간의 필요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반응을 고찰하면서, 말과 행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개교회의 중심적 위치를 인식하였다. 전세계의 교회들은 전 역사에 걸쳐서 자기 주위에 있는 필요들에 대해 적극적 관심을 나타내 왔으며, 곤핍한 자를 계속 섬겨 왔다. 우리는 원조 단체들이 그들의 역할을 교회로 하여금 그 임무를 완수하도록 촉진하는 것이라고 보기를 촉구한다.
  42.  우리는 근년에 와서 복음과 그것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서 이루어진 진보를 인식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증거에 결함이 있음을 인식하며, 우리의 사역에 대한 성경적 기초를 보다 잘 이해하고 싶은 우리의 욕구를 긍정한다.
  43.  우리는 원조 단체의 후원자들이 대체로 인간의 고통과 기아와 필요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이 관심이 올바로 표현되지 않았다고 인식한다. 기름을 모으려는 노력 가운데, 가난한 자들의 상태가 종종 기부자의 필요와 기대를 채우기 위해 착취되는 경우가 있다. 모금 활동은 반드시 복음과 일치해야 한다. 단체의 청지기직 책임은 사역을 위한 자원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경상비를 현저히 줄이려는 것이다.
  44.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 원하는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의 가치관을 나타내는 긍정적 변혁을 우리 조직 안에서 수행하라는 도전을 받았다. 일례로, 우리는 동일 사역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과의 경쟁을 피해야 하고, 또 약하고 비성공적인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을 망각하는 의기 양양한 태도를 가지지 말아야 한다(갈 2:10 ; 시 147:6). 우리는 지속적으로 우리의 행동을 검토하여 성경적 완전과 교회 및 다른 단체들과의 진정한 동반관계를 확보해야 한다. 자원 이용 방법을 포함하여, 사역 정책에 대한 결정은 봉사 대상이 되는 사람들과의 협의 하에 이루어져야 한다.
  45.  우리는 우리의 촉진 활동이 실제로 우리가 하는 일을 나타내도록 확인하여야 한다. 우리는 기독교 변혁이 현장에서 체험되는 방법의 완전한 의미를 우리의 기부자들에게 교육시킬 책임을 받아들인다. 성령께서 우리를 이 사역으로 인도하셨다. 교육 책임을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이 과정이 일부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접근법에 의문을 품게 함을 알았다. 우리는 겸손과 인내와 용기를 가지고 교육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46.  우리가 실행하는 모든 프로그램과 활동에서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의 주권과 사랑 가운데 우리가 섬기려 하는 지역사회에서 이미 활동하고 계신다는 것이다(행 14:17 ; 17;23 ; 롬2:9-15). 그러므로 원조 단체들은 이들 지역사회의 관심을 주의 깊게 듣는 일에 적절한 우선 순위를 두어, 쌍방 커뮤니케이션과 프로그램의 지역 소유를 촉진하여야 한다. 주된 원리는 지역 주민과 서구 단체들이 함께 협력하는 평등한 동반관계이다. 개발을 위한 많은 모델들이 제3세계에서 창안되었다. 기독교 원조 단체들은 모든 면에서 이들 지역 주도권이 성공하도록 격려하여야 한다. 이런 방법으로 구속받은 천국 공동체는 일단의 변혁 모델들을 시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47.  원조 단체들이 기부자들에게 책임을 져야 하는 합법적인 필요는 종종 서구의 경영 체제를 지역 사회에 강요하는 결과를 낳는다. 여기서 전제되는 것은 서구식 기획 및 통제 체제가 책임성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체제라는 것이다. 이들 단체가 봉사하려 하는 지역 사회는 흔히 다른 문화권에 속하기 때문에, 이러한 강요는 민감한 사회 변혁 과정을 제한 억제할 수 있다. 우리는 두 문화 모두에게 책임지는 체제를 만들 수 있도록 원조 단체들이 그들이 섬기려는 사람들과 대화를 확보하기를 촉구한다. 우리의 사역은 언제나 하나님 나라 안에서의 우리의 상호 의존을 반영하여야 한다(롬 14:17-18 ; 고전12장).
  48.  기독교 단체로서의 우리의 활동에 대해 명백히 상반되는 요구가 있음을 주목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죄와 타협을 의식한다. 우리는 회개에로의 부르심에, 부조화의 자제와 우리의 개인적 조직적 삶에 있어서의 사치를 포함시킨다. 우리는 진리의 영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를 변혁의 참대행자로 만드시기를 구한다(행1:8).

.  천국의 도래와 교회의 사명
  49.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와 미래, 사회와 개인, 육체와 영, 모두에 해당된다고 확언한다. 만일 다른 사람들이 현재, 사회, 육체를 지나치게 강조했더라도, 우리는 성경 메시지의 그러한 차원들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천국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인류 역사 안으로 들어왔음을 즐겁게 선포한다. 천국은 마치 겨자씨처럼 현시대를 판단하고 변혁시키면서 성장하고 있다.
  50.  역사 안의 하나님의 활동이 교회에 초점을 맞추었다 할지라도, 교회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교회에 초점을 맞추신 것은-구약에서 이스라엘에게 그러셨듯이-열방에게 복주시려는 것이 그 목적이다(창 12:1-3, 15장, 17장 ; 사 42:6). 따라서 교회는 주님과 인류를 위해 존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던 것이다.(마22:32-40).
  51.  교회는 세상에 이 시대 및 오는 시대에 대한 소망을 불어넣도록 부름 받았다. 우리의 소망은 절망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리가 새로운 미래를 소망하는 것은 현재가 공허하기 때문이 아니다(롬 5:1-11). 오히려 우리가 미래에 소망을 갖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신 일과 또 하나님께서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일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완전한 구속과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가 되실 날의 도래에 대한 보증으로 이미 성령을 받았다(고전 15:28). 우리는 현재의 구원과 미래의 소망의 복음을 증거 하면서, 하나님의 새 창조를 위한 무시무시한 산통을 겪는다(롬8:22). 종말을 고대하는 말세의 공동체인 우리는 종국 전단계(penultimate)에 참가함으로써 종국을 준비한다(마 24:36 ; 25:46).
  52.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세상에서 진정으로 힘차고 충만한 사명에 우리 자신을 바쳐서, 폭발적인 창조력과 수고를 아끼지 않는 성실함을 함께 작은 일에 드리도록 도전 받는다. 우리의 사명과 비젼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지도로 성장하여야 한다(딤후 3:16). 회개하여 부흥되고 활기찬 교회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회개와 믿음을 요구하며 동시에 그들이 악과 불의의 세력에 도전하도록 무장시킨다(딤후3:17). 따라서 우리는 구원을 단순히 영원한 미래로 귀속시키거나 또는 지금 여기서 이루어져야 할 정치사회 질서와 동의어로 여기거나 하지 않고 전진한다. 성령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아버지 우편에 앉으시고 하늘과 땅의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가 되신 분을 섬기고 선포하도록 우리에게 능력을 주신다(엡 1:10,20-22).
  53.  마지막으로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께 의존함을 고백한다. 우리는, 변혁은 결국 하나님의 일이지만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일에 종사하게 하셨음을 긍정한다.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특별히 뛰어난 변혁자이신 그의 영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깨우치시고 우리의 상담자가 되게 하시며(요 16:7), 그의 많은 은사들을 우리에게 주게 하셨으며(롬 12장 ;고전12장), 우리를 무장시켜 원수에 대항하여 정복하게 하셨다(고후 10:3-5 ; 갈 5:22-23).
  우리는 우리가 지배하지 않은 죄와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의 부족이 성령님을 슬프게 한다는 사실을 상기했다(엡 4:30 ; 갈 5:13-16).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가 용서받도록 우리의 영이 새로와지도록, 그리고 하나님 나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롬14:17)의 나라- 가 임하게 하는 즐거운 일에 동참하는 특권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한다.

출처 : http://kccmo.or.kr/declaratio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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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들을 향한 편지

  지구상의 모든 대륙들로부터 온 우리는 오늘날의 구원(Salvation Today)이 보장하는 약속들과 동시에 그것이 필요로 하는 요구들을 함께 탐구하기 위해 방콕에서 만났다.  우리는 기대 이상을 얻었다 : 우리는 그것을 즐겁게 그리고 실제로 경험했고, 축하했다.  우리는 이 며칠간의 경험을 여러분과 나누기를 원하는데, 그것은 두 가지의 집중적인 이유 때문에 매우 풍성한 경험이었다.

1.  이 회의는 대부분의 우리에게, 아마도 이전의 그 어떤 회의보다 더, 에큐매니칼이란 단어의 깊은 이해를 가져다 주었다.  우리 모두는 자유스럽고 참 친교를 확신하는 가운데, 우리의 관심과 고통 희망을 표현하는 방법을 알 수 있엇고 또 표현할 수 있었다.  타협 없이 미래에 대해 도전하면서, 대화가 특히, 국내적 빈부자와 국가간 빈부자 사이에서 솔직했다.  우리는 정교회 참여자들의 수가 작아 좀 더 충분한 에큐매니칼 정신 표현에 장애가 되었음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2.  우리는 복음을 함께 공유하고 읽을 때 각 개인과 그룹이 자기의 상황 속에서 복음이 요구하는 바를 분별할 수 있을 때, 복음 속에 담겨진 새롭게 하는 능력을 깨달았다.  그것을 위해 각 사람의 정체성이 존중되어야 한다.  우리의 있는 곳에서 우리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모든 덕을 말로만이 아니라 기도와 노래와 예술로 함께 나누는 것은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 유럽, 태평양등지에서 온 우리를 충분히 풍요롭게 했다

  우리의 나눔을 통해 3가지 분명한 결과가 드러났다 :

1.  신학적인 토론을 피하거나 최소화함이 없이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일이 없음이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가운데 우리가 만난 터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계신 인격성임이 분명해졌뎌.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그분의 부활에서 보여진 그 십자가 구원의 능력을 다 같이 인식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여러분을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라고 청한다.  우리 자신의 혼란을 넘어, 우리의 가장 복잡한 문제들 한가운데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사람들의 진정한 호심 속에 표현되는, 단순하면서 포괄적인, 사건들과 세계의 일상적 과정의 놀라운 역전인 그분의 구원을 제공하고 계신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케 하고자 원하시는 것이 인간 실재의 전체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십자가의 전적인 연약함을 수용하셨기에, 모든 능력이 그분에게 주여졌다.  그분이 최후의 승리를 보여 주시는 마지막 때까지, 우리는 사람들이 참으로 자유롭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인 인간으로서의 책임을 수락할 때 마다 그분이 일하고 계시는 것을 안다.

2.  또한 우리의 심판자로서 우리가 만난 그분과대면하여 우리는 그분의 요청의 단호함과 우리가 믿고 있는 바와 행하는 바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의 분명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 자녀들의 모든 영광스러운 자유함을 약속하는 구원으로 인해 우리는 오늘날 사람들을 억압하는 모든 것, 사람들 내부에 있을 뿐 아니라 사회 속에도 존재하는 죄에 대항하는 노력에 좀 더 온전히 헌신해야 한다.  인종정책, 사회적 불공정, 경제적정치적 압박 등의 문제들과 인도차이나 전쟁이나 자유를 향한 투쟁에 대한 유혈진압이라는 비극적인 부그러움, 기술 문명의 비인간화와 인류의 미래에 대해 그것이 제기하는 위협등, 이 모든 것들이 기독교도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행동으로 표현하도록 절박하게 도전한다.

  신앙과 삶의 일치라는 면에서 그리스도의해방시키는 힘에의 이 필연적인 복종은 그것이 수행되어야하는 상황의 분석을 동반해야만 한다.  이런 영역 내에서의교회의 타협들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힘의 남용적인 잘못된 사용은 솔직히 밝혀지고, 분명히 비난받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비통한 결말로 끝맺음을 한 십자가는 우리에게 우리가 얼마나 자주 그 길을 가는 것을 멈추는 가를 인식케 하고, 우리로 비록 그 길이 희생을 초래한다고 할지라도, 기쁘게 다시 걸어가도록 만든다.  그것은 우리로 말로 증거하게 하고 그들도 역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런 저런 신앙의 소유자들이나 이런 저런 신념의 소유자들과도 대화를 시작하도록 강권한다.  차이점들이 있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적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되며,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를 원하시는 예수를 통하여 형제자매로 여겨야 한다.

3.  방콕에서 나눈 경험은 우리의 삶을 부요하게 할 공동적인 삶의 구조를 계속 찾도록 한다.  모든 사람들이 온전한 책임을 지고 온전한 정체성을 얻을 수 있도록 우리가 6대주라는 하나의 나누어진 세계에서, 선교에 대한 우리의공통적인 소명에 함께 대응하는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단지 길의 출발점에 서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성숙하고 정직한 관계를 발견하기 위해 우리에게 더 많은 창조적인 상상력을 사용할 것을 요구하는 몇몇 고무적인 실험들의 발전을 인식한다.  이것이 참된 갱신이 되기 위해선 우리는 어떤 고통스러운 결단을 하도록 해야한다.  전통적으로 자원받는 교회들의 완전하고 책임있는 정체성이 더 빨리 심화될 수 있게 하기 위해, 거기에서 외국 자본들과 직원들의 임시적인 철수가 필요할지 모른다.

  보편적 교회의 실재가 삶으로 경험되어야 하는 것은 지역적 차원에서이다.  우리 공동체들에 도전하는 계속 늘어가는 이미 현상을 경함하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모든 교회들은 낯선 자들을 교회의 보편성을 명백히 하고 지역 선교에서 그것을 공유하는 형제들과 자매들로 그들의 중심에 받아들이도록 불림을 받았다.  하나님은 우리가 수용하는 것을 배워야하는 보화를 우리 앞에 놓으셨다.

  그것은 우리가 글로 쓰는 위대한 희망의 징조 아래에 있다.
  우리의 무력함 대문에 수용할 수밖에 없는 겸손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ᄊ므은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과 그것이 구원의 문을 활짝 연다는 것을 다시 한번 배웠다.

오늘날의 구원에 대한 고백

방콕 회의로부터
  우리가 이 교제 가운데서 함게 만났을때, 우리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기쁨을 경험했고, 서로간의 신앙을 통해서 새로워지고 도전을 받았다.

  우리는 우리 주님께 대한 복종에 있어서의우리들의 실패와 그 분이 우리 앞에 놓으신 길들에 대한 무지를 깊이 인식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갱신을 위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동시에 자유롭게 하는 심오한 회개의 느낌에 의해서 감동받는다.

  세상적 문제와 복잡함과 우리의 교회의 구조와 역할에 관한 혼동을 초월해서 우리는 어떤 어둠도 소명시킬 수 없는 빛의 비추임을 본다.

  감사와 즐거움으로,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의충분성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다.  우리는 그분을 이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모든 것의 통치자이신 주님으로 안다.

  그분은 개개인에게 모든 악과 죄로부터 하늘과 당의 모든 능력으로부터, 삶과 죽음의 모든 위협으로부터 그를 자유롭게 할 능력을 가지고 오신다.

  그 분은 우주의 주인으로 세상에 오시되 가난한 자들과 배고픈 자들에 대한 깊은 연민을 가지고 무력한 자들과 억압받는 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오신다.  힘있는 자들과 억압자들에게는 그 분이 심판과 자비로 오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정의가 온 모든 나라에 비취도록 그 목적의 성취를 위하여 교회 내와 교회를 넘어서 역사하심을 본다.

  그분은 사람들을 그의 주권에 대한 결정적이고 개인적인 응답으로 부르는 것과 그것에 의해서 모든 사람이 정의를 알 수 있고, 온전히 인간적이 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움직임과 사역들에 대한 명백한 헌신을 통해 그의 교회가 그 구원 행위에 참여하도록 부르신다.

  현실이 어떠할 지라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능력과 승리에 대한 즐거운 신뢰 속에서 자유와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다.

주께서 가까우시다.
(출처 : http://kccmo.or.kr/declaration.ht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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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할 거룩한 특권인 동시에 거역할 수 없는 의무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반드시 온 세계로 확장되어야 할 사명이다. 교회의 선교를 통해서 그의 이름이 모든 민족 가운데서 영광을 받게 될 것이며, 인류가 그 미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아 새 생명을 얻게 될 것이며,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이 그의 재림에 한 기대속에 확립될 것이다.
우리가 반드시 고백할 것은, 비록 항상 같은 정도로 충실하거나 명확하지는 못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늘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을 이해해 온 방식이다. 교회의 과업과 총체적인 선교적 의무에 대한 인식은 선교를 독일 개신교회와 1961년에 설립된 WCC의 <세계 선교와 전도분과와위원회>에 융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 분과의 목적은, 그 규약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 세계의 모든 사람이 그를 믿고 구원받도록 끝까지 전파하는 것”을 감당하는데 있다. 이 정의가 신약 성경의 근본적인 사도들의 관심을 반영하며 개신교 선교운동의 선조들이 지녔던 선교에 대한 이해를 회복시키는 것이라는 것이 우리의 확신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조직된 기독교 세계선교는 근본적인 위기로 말미암아 흔들리고 있다. 외부적인 반대나 우리 교회와 선교 단체들의 영적 능력의 약화만이 문제가 아니다. 그 동기와 목적의 음험한 왜곡에 의한 기본적 과업을 바꾸어 놓은 것이 더욱 위험하다.
그 내면적 변질에 대하여 깊이 염려하기 때문에, 우리는 다음 선언을 하도록 부르심을 느낀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자신을 발견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비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그의 구속사역을 지속할 책임이 있음을 강조한다.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와 회중의 지도자들인 우리에게 강조한다. 그들에게 그 영적 사명의 전 세계적인 전망이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끝으로, 우리를 각자의 영적 전통에 따라 선교 활동의 진정한 목적을 달성하도록 특별히 부름 받은 모든 선교단체와 협력기관들에게 강조한다. 우리는 당신에게 다음의 논제들을 그 성서적 기초에 근거하여 점검하고, 교
회와 선교, 그리고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점점 명백해지고 있는 그 수행 상의 오류나 방식에 관하여 현재 상황에 관한, 이 진술이 정당한지 판단하도록 긴급히 그리고 간절하게 요청한다. 찬성할 경우에 우리는 당신이 서명을 함으로써 함께 이 선언에 동참하며 당신이 영향을 미치는 영역 안에서 이 지도원리들을 따르도록 강권함으로써 회개와 결단을 촉구하는 일에 우리와 동참하여 주기를 호소한다.

1.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8-20, 이 성경 인용은 New English Bible에 따른 것이다)
기독교 선교는 오직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위임과 신약성서에 나타난 사도들과 초대 기독교의 증언에 의해 기록된 그의 구속 행위 안에서만 그 전파의 기초와 목적과 과업, 그리고 내용을 발견한다. 선교는 복음의 본질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시대에 대한 사회 정치적 분석과 비기독교 세계의 요청으로부터 선교의 본질과 과업을 결정하려는 작금의 경향을 반대한다. 우리는 복음이 현대인들을 만나기 전에는 그들에게 가장 깊은 차원에서 말해야하는 바가 분명하지 않다는 주장을 부인한다. 오히려, 사도적 증언에 의하면, 복음은 규범적으로 그리고 단회적(單回的)으로 주어진 것이다. 만남의 상황이란 단지 복음 적용의 새로운 국면들을 제공할 뿐이다. 우리의 기본적 준거의 틀로서의 성서를 포기하는 것은 선교의 혼란과 선교 과업과 총체적 이념으로서의 세상에 대한 의무의 혼동을 초래한다.

2.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나라의 눈에 내 존대함과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나를 알게 하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겔 38:23)

3.여호와여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이다. (시 18:49, 롬 15:9) 선교의 일차적이며 최고의 목표는 전 세계에 걸쳐 오직 한 분 하나님의 이름만을 영광스럽게 하며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전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의 선교가 더 이상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은 새로운 인간으로 나타남과 새로운 인간성이 모든 사회 영역에로 확장되는 것만큼 그것이 관심사가 아니라는 주장에 반대한다. 인간화는 선교의 기본적 목표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속 행위를 통하여 이루어진 우리의 거듭남의 산물이거나 혹은 세계 역사 과정을 통하여 영향력 있는 행위를 수행하는 능력을 가진 기독교 전도의 간접적인 결과이다. 선교적 관심이 인간과 사회를 향해 일방적으로 전개되면 무신론을 초래한다.
3.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행4:12) 성서가 그 인격의 신비와 구원 사역을 통해 선언하신 대로 참 하나님이시며참 인간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선교의 기초이며 내용이며 근거이다. 이 선교의 목표는 모든 삶의 분야에서 모든 민족에게 그의 구원의
은사를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라는 근거 안에서 하나님께 속해 있는 모든 비그리스도인들에게 그를 믿고 그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도전한다. 영원한 구원이 그 안에서만 그들에게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이 세계의 종교들과 역사적 변화와 혁명들속에 익명으로 너무나도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복음의 직접적인 전달이 없이도 그를 만나며 그 안에 있는 구원을 발견할 수 있다는 거짓 가르침
(New Delhi WCC 제 3차 총회 이후 에큐메니칼 운동 가운데 퍼지고 있는)에 반대한다.
우리는 이와 함께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그 인간성과 윤리적 모범으로 한정시키는 비 성서적 제한을 거부한다. 그런 사고 속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다른종교와 이데올로기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인도주의적 원칙에 동조함으로 그리스도와 복음의 고유성이 포기된다.

4.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와 충분히 자격을 가진 일꾼들에 의하여 설교와 성례와 예배를 통하여 그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영원한 구원에 대한 증언과 표현이다. 이 구원은 단 한 번에 모든 인류를 위해 이루어진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십자가에 죽으심에 근거한다.
그러나 개인이 이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은 결단을 요구하는 복음 전파와 믿는 자를 사랑의 봉사에 자리 잡게 하는 세례를 통해서이다. 신앙이 회개와 세례를 통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는 것과 같이 불신앙은 그 구원의 거부를 통하여 멸망에 이르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적인 구속 행위에 대한 지식이나 이에 대한 믿음과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모든시대의 모든 사람이 이미 중생하였으며, 이미 그와 화평을 이루고 있다는 보편적인 사고에 반대한다. 그러한 그릇된 생각을 통하여 복음화의 사명은 그온전하고 권위 있는 능력과 긴급성을 모두 잃는다. 그것으로 인하여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영원한 운명에 대하여 잘못된 안심을 하도록 속임을 당한다.
5.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9) 선교의 기본적인 가시적(可視的) 과업은 모든 민족들 속에 메시야적, 구원받은 공동체를 불러내는 것이다.
선교적 복음 전파는 모든 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설립하도록 이끌어야 하며 그 교회는 소금과 빛으로 새로운 사회적 환경을 구현하는 실체로 정의되어야 한다.
성령은 복음과 성례를 통하여 교회의 신도들에게 새 생명과 영원한 생명, 그리고 하나님과의 사이에 영적 교통을 주신다. 그 증언을 통하여 잃어버린바된 자들 - 특히 믿음의 공동체 밖에 있는 - 그리스도의 몸의 구속적 지체로 자리를 옮기게 하는 것이 교회의 과업이다. 교회는 이 새로운 형태의 교제를 이루는 것을 통해서만 복음을 확실하게 제시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와의 교제로서의 교회가 단순한 세계의 일부라는 견해를 반대한다. 반대로 교회와 세계의 차이는 구원의 기능이나 구원에 대한 지식의 차이가 아니다; 오히려 그 본질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우리는 추정되는 모든 사람의 미래의 구원에 관한 지식을 제외하고 세상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주장을 부인한다.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와 사회가 순전히 사회적인, 온인류의 화해를 함께 공유한다는 이 세상만을 강조하는 사회 구원에 대한 일방적인 강조를 거부한다. 그것은 교회의 자기 붕괴를 초래할 것이다.

6. 그러므로 생각하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엡2:11,12)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은 아직 의식적 신앙에 매여 있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주어진다. 비기독교적인 종교나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은 이 신앙에의 참여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들은 신앙과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전에 자기 자신에게 메워졌던 굴레와 그릇된 희망들로부터 자유함을 얻도록 해야 한다. 이스라엘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옴으로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기독교적 종교와 세계관들도 역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과 유사한 구원의 길들이라는 그릇된 가르침을 거부한다. 우리는 세속 종교 신봉자들과의 ꡒ그리스도인으로서의 표현과 그들과 주고받는 대화가 회심을 목표로 하는 복음 전도를 대신할 수 있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그러한 대화는 단지 선교적 의사소통을 위한 좋은 접촉점을 마련할 뿐이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인의 사고와 소망과 사회적 절차들 - 비록 그것들이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밖에 배제된 관계와 분리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 을통하면 세속 종교들과 이념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대신하게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실제로는 그것들이 모든 종교와의 혼합주의를 낳아 반기독교적 방향을 줄 뿐이다.

7.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기독교 세계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 사이에서 인간들 사이에 이루시는 하나님의 결정적이고도 계속적인 구원 행위이다. 복음 전도를 통하여 새로운 나라와 민족들이 그리스도를 반대하든지 믿든지 결정하도록 점점더 많이 초청받을 것이다.
모든 민족이 그에 관한 증거를 듣고 그 증거에 응답하고 나올 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와 적그리스도에 의하여 주도되는 세계 사이의 갈등이 절정에 이를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리스도는 친히 시간 속으로 다시 돌아와 사탄의 마귀적 무력을 해제하시고 자신의 가시적이고 끝이 없는 메사야 왕국을 세우실 것이다.
우리는 동시에 신약성서의 종말론적 기대가 그리스도의 재림 지연으로 거짓임이 판명되었으므로 이제는 포기되어야 한다는 근거 없는 이론에 반박한다.
우리는 동시에 복음의 영향이나 혹은 역사 속에서의 그리스도의 드러나지 않는 사역에 의해 모든 인류가 이미 보편적인 평화와 정의의 길로 나아가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 그로 인하여 거대한 세계공동체로 하나가 될 것이라는 열광적, 유토피아적인 이데올로기를 반박한다. 우리는 메시야적 구원을 진보, 발전, 사회적 변화 등과 동일시하는 것을 논박한다. 이런 것의 치명적인 결과는 사회적 긴장이 있는 곳들에서 사회 개발을 돕고 혁명에 동참하는 노력들이 기독교 선교의 현대적 형태로 보는 일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딴에는 그들의 궁극적 목적의 방향인 오늘의 시대의 유토피아운동과 선교를 동일시하는 자기 해명일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모든교회들에 의한 정의와 평화에 대한 결정적인 옹호를 긍정하며 우리가 발전을 돕는 것은 ꡒ네 이웃을 사랑하라ꡓ는 그리스도의 명령뿐 아니라 자비와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시의 적절한 실현이라는 것을 긍정한다. 우리는 그 곳에서 선교의 중요한 동반성과 확실성을 본다. 우리는 또한 회심이 가져다주는 인간화의 결과들을 다가오는 메시야적 평화의 전조들로 긍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히 확정된 신앙을 통한 하나님과의 화해의 복음과는 달리 우리의 모든 사회적인 성취와 정치에 있어서의 부분적인 성공들은 다가오는 나라의 종말론적인 그의 나라가 아직도” 오지 않았음과 지금도 여전히이 세상의 왕자인 악마와 죄와 죽음의 권세가 아직 멸절되지 않았음으로 인하여 제한될 수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이것이 우리의 선교 사역에 우선순위를 결정하며 우리로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5) 라고 약속하신 그를 기다리도록 만든다.

(출처 : http://www.davidcho.o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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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前文)
휘튼선언은 세계 각국으로부터 온 복음주의자들(evangelicals)이 8일간 모였던 교회의 세계선교에 관한 회의(Congress on the Church's Worldwide Mission)의 참석 대표자들에 의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이 선언은 그 회의의 배경과 목적, 기대 및 성과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루이스 킹 공동의장은 선언문 낭독에 앞서 대표자들에게 기조강연을 했다. 킹은 이 회의에 71개국가들로부터 938명의 공인된 대표자들이 등록했다고 말했다. 초교파 해외선교협의회
(Interdenomina tional Foreign Mission Association)와 복음주의 해외선교협의회(EvangelicalForeign Missions Association)에 속한 백 개의 회원단체들이 대표를 보냈다. 모인 협의회에 속하지 않은 50여 개의 다른 기관들(agencies)이 대표자들을 보냈다. 그 외에 39개의 특별한 선교관심그룹, 14개의 비(非)북미(北美) 기관, 그리고 55개의 학교들이 참여했다. 회의는 에큐메니칼적이며 평화적이었고, 역사적 정통성의 맥락(context)내에서 견해를 밝히기로 결정했다.
킹 의장은 선언문이 오류를 범할 수 있고 지식에 있어서 유한한 인간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이 선언은 단지 시작일 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통찰력을 주실 때 복음주의자들이 그것들을 고찰함에 따라, 수정되고 변화될 수밖에 없다. 이 선언은 우리시대의 특정문제들에 영향을 받았고, 그 문제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미래의 변화하는 상황은 분명히 더많은 회의와 도 다른 선언들을 필요로 할 것이다.
모든 대표자들이 선언문 내용 하나 하나에 모두 동의할 것을 기대하거나 그들이 그래야만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선언문은 회의의 하나의 합의된, 그리고 종합된 의견의 최종적인 형식이다. 결론들은 발표된 논문들을 가지고 토론한 대표자들의 견해를 반영했다. 그리고 그들의판단은 최종원고 작성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게로 넘겨졌다.
본래적인 한계성으로 인해, 이 회의는 현재 관심이 되는 중요한 몇 가지 주제를 다루지 못했다.그러나 다루지 못했다는 것이 그것에 대한 무관심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에 대해서는한마디도 언급되지 않았다. 전쟁과 평화 문제가 토론되지 않았다. 공산주의는 그자체로 의제에상정되지 않았다. UN의 역할과 중국의 UN과 세계와의 관계는 제외되었다. 회의는 의도적으로그 토론과 선언을 사전에 동의한 10가지 주제로 제한했다.
선언문은 그 선언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한 대표자들을 보낸 기관들을 얽매지 않는다. 선언문은 회의에 대한 가장 깊은 확신의 표현으로 전달된 대표자들이 속한 기관들과 그 밖의 기관들에게 전달되었다. 모든 기관은 그것을 연구하고, 그 내용들을 검토하며, 그 안에 포함된 진리를 확신할 때 그것들을 수용하고 실천하도록 부탁한다.
선언문 채택 후에, 대표자들은 엄숙하게 한 목소리로 이 세대 안의 세계 복음화라는 하나님이 교회에 부여하신 과제를 성취하도록 자신들을 결속하는 서약(the Covenant)을 복창했다. 그들은 영속하시는 성령의 임재를 의식하고 성령계서 회의를 통해서 자신들에게 그리고 세계를 향해 말씀하셨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마틴 루터가 작곡한 찬송,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합창하였다.
이 선언문은 1966년 4월9일- 16일에 일리노이 주 휘튼에서 소집된 <교회의 세계선교에 관한 회의: Congress on the Church's Worldwide Mission>에 참석한 대표자들에 의해 서명되었다. 어떤 시급함이 일천 명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대표자들과 종들로 하여금 이 <교회의 세계 선교에 관한 회의: Congress on the Church's Worldwide Mission>를 소집하도록 촉진시켰는가 ? 현재의 어떤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함께 모여서 진지한 연구와 협의를 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였는가? 무엇이 이 포괄적인 선언문을 우리자신들로부터 우리의 후원자에게, 경계를 넘어서 동료 신자들, 그리고 불신앙의 세계로 향하게 하는 대담성을 가지게 하였는가? 모든 곳의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하는 어떤 도전, 어떤 문제들이 이런 종류의 반대 행위와 반응을 강권하였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우리는 진지하고 자세한 대답을 시도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 교회 안에서의 그의 영광을 위한 열정적 관심, 인간의 영원한 복락에 대한 깊은 관심 때문에 말할 수밖에 없다. 진정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응답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많은 복음주의적 기독교인들은 불안하고 걱정스럽다. 어떤 이들은 이 변화의 시대에 있어서의 성서적 증언들의 타당성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 왜 우리는 마음과, 힘과 재원을 이 발전해 가는 세대의 모든 족속과 민족과 나라를 향한 그리스도의 선포에 쏟아야 하는가? 이 불확실성이 우리로 하여금 교회의 성서적 선교에 다시 초점을 맞추는 선언문을 작성하도록 강권한다.
방해하는 세속적 힘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선교 목적을 향한 헌신을 좀먹으면서 기독교인들의 마음에 작용하고 있다. 우리는 점차적으로 “점점 더 다루기 힘들어 가는 다루기 힘든 세계”로부터 뒤로 물러나 대가가 필요한 전진을 향한 호소에 귀를 막아 버리고, “왜 과거의 성과에 만족해 하지 않을까? 드디어 교회는 이제 전 세계에 퍼져있다. 젊은 교회들로 하여금 그 과업을 끝마치게해야지.” 라고 합리화한다. 우리는 성서의 조명 아래서 솔직하게 자기를 반성하고 우리 마음가짐을 남김없이 드러낼 필요가 있다. 개선책의 적용이 자기 점검에 뒤따라야 한다. 상황은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우리 헌신의 깊은 갱신과 성령께서 우리와 그의 교회 안에서 그것을 이룰 수 있도록, 만일 필요하다면, 어떤 희생과 고통까지도 감수하고자 하는 자발성을 강권하신다.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교리적 불확실성, 새로운 신학 사조, 공공연한 배교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있다. 사탄은 거짓 증거를 조장하여 의심을 퍼뜨리고 참된 신앙을 파괴하려고 밀밭 가운데 독초를 뿌리는 일에 열중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것인지 아닌지 영들에 대한 분별”을 하고자 하는 의지와 능력이 필요하다. 교회는 교회의 순수성, 평화, 그리고 하나됨을 수호하기 위해 신약성서의 훈련과정을 이행하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백성은 죄악과 잘못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요청하는 예언자적 목소리가 필요하다.
세계는 격동 속에 있다. 기독교 신앙에 적대적인 세력들이 점점 강해지며 공격적이 되고 있다. 특별히 공산주의 같은 정치적 운동들은 집단적 인간의 숭배를 강요한다. 그들은 어떤 “신”의 도움 없이도 인간은 사회를 완성시킬 것이라고 호언한다. 그들은 때때로 다시 부흥하고 확대되고 있는 전투적인 고대 민속종교들과 함께 발을 맞추어 행진한다. 거짓 기독교 사교들은 영적 능력을 위한 인간의 선천적 욕망을 채워주면서 증가하고 성장하고 있다. 새로운 도전이 성서적 기독교에 충실한 교회들 앞에 가로놓여 있다. 갈등과 예수 그리스도의 백성에 대한 증대하는 적대감의 상황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충분성이란 어떤 의미인가? 소망의 선언이 긴급히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시대를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그와 그의 복음의 진보와 역사 속에서의 그분의 승리를 믿는다. 우리는 교회와 민족가운데서 그가 은혜롭게 사역하시는 수없는 증거들을 발견한다. 우리는 우리가 교회의 보편성을 말할 수 있음을 기뻐한다. 우리는 모든 민족 가운데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의 확실성을 나타내는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대한 증인들이 있음을 믿는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 24 : 14). 성서는 그의 참된 교회가 완성될 때,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것이라고 단호하게 선언한다. 모든 인간의 역사는 그 안에서 완성될 것이다. (엡1:10, 빌)우리의 무가치함을 인정하면서, 우리는 전 세계에 걸친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 형제자매, 신앙의 세계 가족에게 전한다. 비록 그들처럼 우리도 “주예수의 이름으로 우리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씻음 받고... 거룩하게 되고... 의롭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은총의 대상이 되었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 우리의 사역의 부족함을 느낀다.
우리는 무거운 죄를 지었다. 우리는 우리로 종종 세상의 관심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대처하는 것을 막는 세상으로부터 비성서적으로 고립된 죄인이다. 기독교 사역을 수행함에 있어서 우리는 일의 진척과 대중성에는 너무 많이 의존하는 반면 지속적인 기도와 성령에는 너무 의존하지 않는다. 우리는 때때로 타당하고 매력적인 방식으로 복음을 전달하는데 실패한다. 우리는 외향적인 복음 증언과 높은 윤리적 관심의 그리스도인을 지속적으로 개발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 그리고 우리의 형제들에게 우리를 용서하여 달라고 간구한다.
그러나 우리의 고백은 좀더 구체적이어야 한다. 우리가 성서의 조명아래서 과거의 사역에 대한 솔직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받을 때, 우리는 우리가 종종 다음과 같은데서 실패했던 사실을 발견한다:
우리 주님 재림의 복된 소망을 개인적 성결과 선교적 열정의 자극제로서 충분히 강조하는데 있어서,복음에 대하여 인구들 속에 교회를 증가시키는 과제의 전략적 중요성을 어떤 적절한 방식으로든지 분별하는데 있어서,새롭게 뿌려진 교회들 가운데 계시는 성령의 인도하시는 힘에 전적으로 의지하는데 실패함으로 온정적 간섭주의를 지속시켜 국가교회와 선교 단체사이에 불필요한 긴장을 야기시킨 것, 인종차별, 전쟁, 인구 폭발, 가난, 가정 파탄, 사회 혁명, 그리고 공산주의 같은 문제에 성서적 원리를 적용하는데 있어서, 비용이 많이 들고 비효율적인 행정 구조의 중복의 제거하고 우리 손길이 닿는 범위를 넓히는 협력형태를 촉진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회개하는 마음으로 인정하고 있는 이러한 실패들은 우리에게 이 객관적인 평가와 성서의 온전케 하는 권위에 순종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의 실패를 점검하고 수정하는 것 외에, 우리는 성서적 기독교의 유일성과 궁극성에 도전하는 종교적 움직임들을 점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회의는 그것들이 우리의 성서적 신앙에 제기하는 구체적인 위협에 대한 더욱 심도 있는 통찰과 균형 잡힌 사고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소집되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 제2바티칸 공의회에서 바뀐 그 외적 입장과 내적 조직 그리고 개방적인 대화를 위한 명백한 욕구로 말미암아 그 조절된 그 이전의 폐쇄성은 우리의 신중한 평가와 해답을 요구한다.
현대 프로테스탄트 운동, 하나님에 의한 계시된 복음의 비실재를 대담하게 주장하며, 영원한 심판을 부정하는 신보편주의를 퍼뜨리며, 공격적 복음전도를 교회간의 화해사역으로 대치하고, “교회”와 “선교”,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성서적 구분을 모호하게 하며, 세계 종교의 단일화의 방향으로 교회의 조직을 창출하고 있는 현대 프로테스탄트 운동도 마찬가지로 신중한 평가와 해답을 강권한다.
위장 기독교 사교들, 배우지 못한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전복하려는 강렬한 노력을 통해 그리고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인 양하는 자신들의 기만적 과시 속에서 영적 능력을 위한 인간의 선천적 욕망을 채워주는 그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신중한 평가와 해답이 요구된다.
비기독교적 종교조직, 새로운 선교적 열정 속에 있는 이슬람교, 힌두교, 그리고 불교 같은 비기독교적 종교조직들이 기독교의 성장에 강력한 위협을 가해오고 있으므로 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신중한 평가와 해답이 요구된다.
앞서간 사도들의 전통을 따라서, 우리가 직면하는 많은 문제들을 성서, 즉 영감으로 되었고 유일한 귄위이며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에 호소한다. 성서는 신앙과 생활에 대한 우리의 궁극적 규율을 구성한다.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고후4:13). 더욱이 신약 성서는 선포(케리그마)와 봉사(디아코니아)간의 조화에 대한 사도적 규범(norm)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우리는 단지 같은 신앙의 사람들이 성서의 조명아래서 우리의 말들을 숙고하고 나아가 그 말들이 사실임을 확인하기 바란다.
우리는 “복음 전파의 지상명령”을 핵심적으로 여긴다. 복음은 우리 시대에 있는 모든 족속과 민족, 나라의 사람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지상과업이다. 우리는 신약성서의 “복음”에 대한 기록을 받아들인다. 복음에 의해 우리는 영적인 삶에 들어와 있다. 복음은 역사 속에 등장했고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유일한 방식으로 행동하신,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나사렛 예수에 관한 것이다. 비록 십자가에 달려 죽었으나 그분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몸으로 부활하셨다. 그리스도는 우리 죄의 속죄 제물로 그 피를 흘리며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그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해서 모든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될 수 있으며, 그의 임재와 그와의 교제에 참여할 수있게 되었다.
그 안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 즉 그리스도 중심의,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삶이 가능하게 되었다.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그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변화(회개)와, 구원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 신앙과 그분의 주권에 순종하도록 초청한다. 이 “복음”의 선포는 그 핵심에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요3:7)라는 분명한 명령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하신 아들을 통해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만일 인간들이 거듭나지 않으면 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어질 수밖에 없음을 믿는다.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 13:3)
전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보편성의 시대에로 나아가고 있는 모든 인간의 문제들과 더불어 이 작아지는 지구 위에서 , 많은 목소리들이 보편적 타당성을 지닌 종교를 요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타당성을 지니고 있는 메시지이다. 우리가 생각할 때 혼합주의는 성서적으로 계시된 기독교의 진리와 그것을 부정하는 비기독교적 종교들이나 기타 다른 사상체계의 다양한 또는 반대되는 교의와 실천을 통합하거나 화해시키려는 시도이다. 동서양의 종교에서나 받아들일 수 있는 비인격적 유신론을 기독교국 안에서 옹호하는 비정상적이고 이단적인 주장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한 혼합주의는 기독교 진리의 독특성과 절대성을 부정한다.
혼합주의는 복음이 거의 이해되지 않았거나 경험하지 않은 곳에서 손쉽게 발전되기 때문에, 성서에 계시된 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그 구원사역에 대한 정확한 메시지를 선포함으로써 고도의 명료성이 추구되어야 한다. 문화적 종교적 장벽을 넘어서서 복음을 효과적이고 타당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우리가 제시하는, 본질적 복음의 진리에 속하지 않는 문화적 첨가물을 제거해야만 한다. 그리고 나서 진리는 그들도 복음의 정확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도록 의미있고 적절한 그 민족의 언어적, 문화적 관점을 배경으로 해서 전달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직면하게 될 어떤 반대에도 불구하고 혼합주의에 저항해야 하며 겸손과 위엄을 가지고 우리의 증언을 해야 한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혼합주의적 행위에 대항하여 증거하는 데 단호했다. 신약의 사도들 또한 복음을 수호하기 위해 영지주의 같은 당시의 혼합주의적 경향과 대항하여 싸웠다. 단한 분이시고 유일한 진리의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기록된말씀인 성서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것이 우리의 중심적 요의이다. 성서적 신앙은 독특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계시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에 무엇을 첨가한다거나, 변화시킨다는 것은 곧 그것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 1 :1,2)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전파함에 있어서 더 큰 효과를 추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혼합주의의 위험을 부각시킬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전파함에 있어서 기독교 진리를 모호하게 할 비성서적인 문화적 첨가물이나 강조점을 피해야만 한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사람들이 혼합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그 속에서 살아가며 봉사하는 종교적 신앙들과 사상체계에 대하여 좀 더 조심스럽고 정통한 종합적 지도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교회 역사 첫 19세기 동안 궁극적으로는 모든 인간이 구원받으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어떤 가르침도 모두 이단으로 강력하게 거부되었다. 오늘날에는, 보편주의가 일단의 주도적인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신학자들에게 수용될 수 있는 가르침의 주류 속으로 급속히 유입되고 있다. 많은 저명한 교회 지도자들이 점차적으로 이 입장을 옹호한다. 신보편주의는 성서가 전적인 전체성과 맥락에서 제시하는 바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의 단편적 사용에 근거한다.
우리가 거부하는 보편주의는 그리스도는 모든 이들을 위해 죽었기 때문에 그는 주관을 가지고 사랑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말한다. 보편주의는 지금이나 앞으로 하나님이나 인간에 의해서 절대로 깨어지지 않을 인류의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통일성을 강조한다.
모든 인류가 화해 “ ”되었다 ; 그리스도를 만난 자들은 만나지 못한 자들보다 유익한 점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도의 차이이지 본질의 문제는 아니다. 비록 사람들이 이생의 삶에서 복음을 믿지 않더라도-심지어 복음을 거부하더라도-그들의 죄와 형벌은 궁극적으로 제거될 것이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보화를 의식하지 못할 뿐이다.
보편주의의 문제는 단지 인간 이성을 성서의 분명한 증거와 성서적 기독교위에 올려놓았다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교회의 선교 전체가 영향을 받는다. 보편주의자들은 단지 그리스도의 보편적 주되심을 선포하고 사람들이 그 사실을 삶속에서 인정할 것을 설교한다. 이것은 쉽게 선교적 소명을 가진 교회에 의한 혼합주의와 궁극적인 자포자기를 초래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자신들을 그분의 친구라고 부르는 자들에 의해 배신당하고 있다.
우리는 성서가 주장하는 보편적인 특징을 적극적은 수용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다(요3:16); 그리스도는 온 세상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다(요일 2:2);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해되었다(골 1:20).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딤전 2:4), 그리고 그리스도안에서 만물이 하나되기를 바라신다(엡 1:9,10), 모든 무릎이 꿇고 모든 입이 그분을 주라고 시인하도록(빌 2:10,11).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전 15:28). 그러나 성서가 성서를 설명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뿐만이 아니라 영원한 형벌도 가르치셨다. 그분은 복 있는 자들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저주받은 자들에 관해서도 말씀하셨다.(마25:34,41,46). 바울은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모든 이들의 영원한 파멸과 주의앞에서 추방을 가르쳤다(살후 1:8,9). 비록 하나님의 권한이 보편적이며 그의 승리가 보편적일 것이라 할지라도, 그의 구원의 은총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만 효과가 있다(요 1:12). 천국과 지옥은 존재한다; 구원받은 자들과 구원받지 못한 자들도 존재한다. 성서는 우리에게 그 어떤다른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해서 성서가 말하는 모든 것을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죄악과 불신으로 인해 영원히 잃어버린 바 됨의 가공할 현실에 관한 성서의 증언을 선포하고 가르침에 있어서 우리 자신이 더욱 솔직하고 철저해질 것이다.
우리는 모든 복음주의적 신학자들이 영원한 형벌과 구원과 화해의 부르심에 대한 성서의 주석적연구에 더 힘쓰도록 격려할 것이다.
필연적으로 교회의 선교는 우리에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죄가 사함 받는 복음을 선포하도록 위탁하셨기 때문에, 가난한자, 병든 자, 곤핍한 자, 억압받는 자 들을 위한 우리의 봉사는 그분에 대한 입으로 시인하는 것을 동반해야 한다.
보편주의에 대한 거부는 모든 복음주의자들로 하여금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이 죄 가운데서 죽음을 당하기 전에 복음을 전파하도록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가 원칙적으로는 거부하는 바를 실제로는 인정하는 것이 된다.
“개종주의”(proselytism)라는 말은 “특히 어떤 종교적 종파나 또는 어떤 견해, 체제, 또한 당으로전향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이 말은 또한 최근에 어떤 교파라도 그 교파내와 교회의 역동적 증언에 대한 반동으로, 어떤 종교 집단과 민족주의적 세력들은 “개종주의가 통제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강요된 전향, 또는 비윤리적 수단(물질적 혹은 사회적)의 사용을 포함하는 개종주의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반대되기 때문에 성서적이고 참된 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신약성서 전체를 통해 사도들과 다른 기독교인들은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전파해 왔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받아들여 그들의 , 오래된 종교적 충절을 버리고 기독교회에 참여하도록 설득했다(행5:29; 8:4; 13:15-41; 18:4-11; 19:8).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가 전달되었던 유대인들과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에게 모두 회개하고 믿으며 세례를 받도록 권면했다 ; 그런 후에 그들은 교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자들은 그들의 동료 인간들을 제자화해야만 한다. 이 명령으로부터 물러나거나 타협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전 세계에 걸쳐 교회와 정부의 지도자들이 어느 곳에서도 박탈당할 수 없는 완전한 종교적 자유의 권리를 위해 일할 것을 촉구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자유뿐만 아니라 개인의 신앙이나 교회 가입을(??) 전파하고 변화시키는 자유를 의미한다.
우리는 기독교국가 안팎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 증거를 억누르려고 하는 전횡적 경향에 저항하는데 있어서 인간들보다는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의 종교적 충성을 변화시키려고 설득하는데 있어서 비성서적이고 비윤리적 방법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개종하지 않은 사람들, 비록 그들이 어떤 교회나 다른 종교에 속해있다고 할지라도, 이 회심을 위해 힘 쓸 때 우리는 성서적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와 희랍정교회, 유대교, 그리고 세속세계 등과 로마 카톨릭과의 관계에 새로운 분위기를 이끌어내 온 주목할 만한 변화가 로마 카톨릭 교회 내에서 생겨났다. 일찍이 분명하게 선이 그어졌던 차이들은 이제는 분명치 않아졌다. 이런 혁명적인 시대에, 교회 안 사람들이 점차적으로 우리시대 인간의 문제들을 협력하여 해결하도록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갱신을 요구하고있다.
제 2 바티칸 공의회는 이러한 갱신에 대한 열망을 가속화시켰다. 성서연구에 대한 새로운 강조들이 로마 카톨릭 지도자들에게 상당한 문제를 제기했다.
카톨릭 교회 당국이 세계선교 활동 강화 요구에 대해 지금처럼 목소리를 내 본 적이 없었다. 많은 카톨릭 신학자들은 이론적 보편주의와 실존주의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그들은 또한 프로테스탄트 신도들을 “분리된 형제들”이라고 부르면서 그들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바란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의 실천적 측면이 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교리는 변할 수 없다고 말한다. 로마 카톨릭의 입장에 따르면 교회의 재연합은 교황의 교지에 근거해야만 한다.
비록 로마 카톨릭 교회가 성경에 대해 높은 권위를 인정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전통은 여전히 결정적인 권위를 갖는다. 로마 카톨릭의 미사에 대한 개혁은 단지 미사 형식의 개혁일 뿐이다. 마리아나 교황의 무오성 등과 관련된 비성서적 교리들은 하나도 포기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성직제도와 성만찬 중시제도에 대한 그 견해를 밝히고 있다. 성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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